부울경을 빛낸 출향인 <39> 남정호 국립현대무용단장
“한국적 몸짓 해외서 통한다” 온라인 공연 제작 세계가 주목

 

무용은 공연을 통해 관객을 만난다. 무대와 관객이 없는 공연은 상상하기 어렵다. 남정호(70) 국립현대무용단 단장 겸 예술감독은 이 한계를 뛰어넘었다. 남 단장이 취임한 2020년은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휩쓸었다. 무용계에는 숨소리도 내기 힘든 혹독한 시기가 이어지고 있다. 남 단장은 지난 2년간 디지털 공연으로 돌파구를 뚫었다. 공연을 영상으로 제작하고 온라인에 올리는 과정은 일의 양과 비용이 대면 공연보다 배 이상 들었다. 남 단장은 “영상 제작비가 굉장히 많이 드는 것은 고사하고 공연을 담아낼 영상 감독을 구하는 것도 어려웠다”고 말했다. 공연 영상은 무료인데, 유료 서비스도 준비 중이다. 남 단장은 취임한 그 해 창단 10주년 페스티벌을 전면 온라인으로 진행했다. ‘즉흥’과 ‘로봇’ 등을 주제로 다양한 안무가와 함께 ‘댄스 필름’을 제작했다. 온라인 상영관 플랫폼 ‘댄스 온 에어’도 이때 만들었다. 덕분에 이제는 누구나 무용공연 작품을 감상할 수 있게 됐다. 남 단장과 국립현대무용단이 팬데믹을 건너는 다양한 시도와 성과를 세계 무용계가 주목하고 있다.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와 링컨 센터도 무용 영상 페스티벌을 한다. 코로나가 잦아든 2021년에는 정부 방역지침을 준수하면서 대면 공연도 열었다. 관객을 직접 만나는 환희는 컸다. 남정호 단장이 예술감독으로 직접 안무한 ‘이것은 유희가 아니다’는 경쟁 사회에 대한 치열한 적자생존의 비극적 요소를 우화적으로 표현한 작품. 코로나로 빈부격차가 급격히 커져 생존 위기에 내몰린 사람이 적지 않은 시대 상황을 대변하는 것 같다. 이 외에도 현대 무용-스트리트 댄스와 국악을 결합한 ‘HIP合’, 한국·일본·싱가포르 안무가들이 참여한 ‘우리 가족 출입금지’ 등을 무대에 올렸다.

남 단장은 경북 김천에서 태어나 가톨릭 재단의 교육기관을 옮겨 다닌 아버지를 따라 마산과 부산에서 초등학교와 중·고교를 마쳤다. 이화여대와 대학원을 졸업한 남 단장은 한국 무용계 최초로 프랑스에 유학했다. 프랑스에서 박사 기초과정을 수료한 뒤 현지 전문 무용단 단원으로 활동하다 귀국했다. “창의적 본능에 따라” 춤을 추고 작품을 만든다는 그를 두고 비평가들은 ‘유희성과 현실 비판’이 그의 작품세계라고 한다. 글 솜씨도 만만치 않아 여러 신문과 잡지에 적지 않은 에세이도 남겼다. 부산시립무용단의 객원으로 안무한 ‘목신의 오후’로 김수근 예술상을 받았고 경성대 무용학과 졸업생과 함께 현대무용단 ‘줌’을 창단했다. ‘부산여름무용축제’도 만들었다. 20년 동안 이어져 ‘부산 국제 무용제’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무용단 ‘줌’의 예술감독으로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많은 작품을 제작했고 공연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 무용원의 뼈대를 만들고 22년간 가르쳤다. 대표적 작품으로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한 솔로 ‘자화상’과 군무 ‘빨래’가 있다. 지난달 17일 서울 예술의전당 4층 그의 집무실에서 만났다.

-국립현대무용단이 열두 돌을 맞이했다.

▶2010년 창단한 국내 유일 국립현대무용 단체다. 무엇보다 동시대 다양한 가치를 무용 작품으로 구현하고 있다. 고유한 예술관을 가진 안무가를 초청하고, 각 작품에 최적화된 무용수를 선발해 공연한다. 국립현대무용단과 한국 현대무용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것이 중요한 임무다. 아시아 유럽 북미 중남미 등 다양한 국제무대에 무용단의 레퍼토리를 소개한다. 이를 위해 해외 유수 무용단, 축제 (조직위), 극장, 예술가 등과 수평적 공동제작 기회를 확대하는 일과 유통망 다양화도 중요하다. 국내 저변 확대 역시 빠트릴 수 없는 일이다. 국민 누구나 현대무용을 직접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생활 속에서 춤을 가까이 접하게 되면 고단한 삶이 다소나마 풍요로워질 것이다.

-팬데믹 시대를 주제로 한 공연기획도 있을 것 같다.

▶주제가 팬데믹인 것은 없다. 대신 생존이란 주제를 가지고 작업하는 안무자가 많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의 작품 ‘이것은 유희가 아니다’ 역시 생존에 대한 것이다. 팬데믹이 우리에게 지나온 것을 성찰하면서 미래를 어떻게 살지 모색할 수 있는 그런 계기를 준 것 같다. ‘25시’의 작가 게오르규의 ‘잠수함의 토끼’에서 토끼 눈이 충혈되면 잠수함 내 산소가 위험 상태라는 것을 예고하는 것처럼 예술가 역시 다음 세상을 미리 알리는 본질적인 역할이 있다. 자기 삶에 팬데믹이 들어와 있을 때는 여기에 대한 본능적인 감각과 생각으로 작품을 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예술이고 예술가다. 좋은 작품이 많이 나올 것이다.

-3년 반의 프랑스 유학생활은 어땠나.

▶프랑스 정부 장학금으로 유학 후 프랑스 남자와 결혼해 프랑스에서 사는 언니의 도움으로 프랑스로 갔다. 한국인 무용가로서는 첫 프랑스 유학생이 됐다. 프랑스 현대무용은 우리나라와 너무 달랐다. 내가 원하고 배우고 싶었던 것을 현장을 찾았다. 그 무렵 쟝 고당이라는 남자 무용수를 만났다. 그의 무용단에 여자 무용수 한 자리가 비었다. 긴장된 선발 오디션을 거쳐 합격했다. 나중에 그에게 “왜 하필이면 나를 뽑았냐”고 물었다. 뜻밖의 답이 돌아왔다. “You are special(넌, 특별하지 않느냐)”고 했다. 다르면 안 되고 같은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우리 문화에 익숙했던 나는 적지 않게 당황스러웠다. ‘다름의 가치’를 깨닫는 계기였다. 3년 반 치열하고 응축된 시간을 보냈다. 독특한 무용가이자 안무가인 쟝 고당으로부터 ‘일상적 움직임’의 가치를 배웠다. 한예종 교수 시절인 2001년 그를 초빙교수로 초청했다.

-대한민국 현대무용의 미래를 열었다는 평가가 있다.

▶경성대에 근무할 때다. ‘한예종’이 설립된다는 기사를 신문에서 처음 읽었다. 막연히 기대하고 있는데 먼저 음악원이 개설됐다. 그곳 학생을 위해서 무용 수업을 해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무대 위에 서야 하는 음악가에게 자연스러운 몸 쓰임을 가르치는 것인데 내가 제일 잘할 것이라고 하더라. 지방에 있어도 인정해주는구나 하는 마음에 기분이 좋았다. 음악원 수업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무용원 설립을 위한 자문회의에도 참석하게 됐다. 기존에 있는 무용과와는 구조가 달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용수 양성을 뛰어넘어 창작자, 즉 음악의 작곡가 같은 안무가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론 무용을 학문으로 할 수 있도록 무용과 외에 창작과를 개설토록 하고 첫 교수를 맡았다. 학교를 위해 우리나라 무용의 미래를 위해서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한국 현대무용이 세계와 나란히 걷는 수준에 왔다.

▶현대무용 초기에는 작품 ‘수입’이 주종을 이루었다. 발레는 말할 것도 없다. 현대무용은 현대 예술의 하나다. 현대예술이라는 관점과 개념 역시 서양에서 왔다고 할 수 있다. 나 역시 유럽에서 처음 유학한 사람으로서 ‘유로피안 프렌치 에스프리’를 수입해 보급했다. 초기 작품 은 냉정하게 말하면 ‘보급’하는 그런 차원이었다. 자기 정체성을 어떻게 확보하고 키워나가느냐가 관건인데 그런 노력이 너무 부족했다. 우리 것이 아닌 우리 것으로 자리할 수 없는 무용은 존재 가치와 의미가 없다. 이것은 본질적인 문제다. 한국적 춤을 통해 나만의 특별한 차이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왔다. 경성대에 있을 때는 택견도 배웠다. 뭔가 나의 유전자에 있는 몸짓을 찾아내려고 애썼다. 나의 대표작 ‘빨래’ 역시 가장 우리 것의 원형을 통해 세계가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가치를 구현하고자 했다. 멕시코 공연 때 멕시코 평론가가 “우리나라 여자도 다 이렇게 빨래를 했다”고 하더라.

-좋은 스승을 만났고 빛나는 제자도 많이 길렀다.

▶신은주 부산국제무용축제위원장, 김현숙 인천대 교수, 강희정 영산대 교수, 류현숙 장애인 무용지도자, 강미희 미야 아트댄스컴퍼니 대표, 김옥련 ‘김옥련 발레단’ 대표, 최병규 서울예술단 지도위원이 경성대 출신 제자다. 정재혁 한예종 무용원 창작과 교수 등이 한예종 출신이다.

조숙자 전 부산대 무용과 교수와 박외선 이화여대 교수 두 분이 평생의 스승이고 은인이다. 특히 조 교수는 부산의 대표적 발레무용가로 1958년 서면에 ‘부산예술무용학원’을 열었다. 나는 중학교 시절 그의 학원에서 처음 발레를 배웠다. 박 교수는 한국에 최초로 현대무용을 소개했다. 1971년 대학에 입학한 나는 4년 내내 박 교수의 문하에서 실기와 이론 무엇보다도 ‘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배우는 행운을 누렸다. 우여곡절 끝에 프랑스 유학 후 다시 스승 조숙자 교수가 이끄는 경성대에 자리를 잡았다. 본격적인 ‘남정호의 무용과 안무’는 부산에서 시작하고 뿌리를 내렸다.

-유달리 가족간 유대감이 깊다.

▶충북 청주고와 일본 상지대를 졸업한 아버지(남규일·1921~1995)는 나의 우상이자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후일 추기경이 된 김수환 신부가 아버지의 대학 동기다. 어머니는 1924년 충북 옥천 출신으로 대전여고를 졸업했다. 노래와 춤이 탁월하고 빼어나게 아름다웠다. 전근하는 아버지를 따라 학교를 옮겨 다녔다. 마산 완월초등을 거쳐 부산 성모여중·고를 졸업했다. 성모여중·고는 아버지가 교장으로 계셨던 곳이고 언니와 나, 바로 밑 여동생도 다닌 곳이다. 유학 전 잠시 모교인 부산 성모여고에서 교편을 잡았다.

-아시아의 중심 도시로 ‘부울경’이 나아가려고 한다.

▶부산과 경남지역은 춤의 근본적인 자질과 기질이 풍성하다고 생각한다. 춤으로 자기를 표현하는 행동과 제스처가 굉장히 강하다. 또 말이 단답형이다. 여러 가지 설명을 하는 게 아니라 딱 한 마디로 잘라 말한다. 추상적이다. 그런 사람이 춤으로써 자기가 설명하지 못한 많은 부분을 설명한다. 그런 기질이 사실은 춤의 바탕이다. 그러므로 부울경만의 독창성과 자존감을 가지고 경상도의 매력을 한껏 살린 콘텐츠를 만들면 된다. 투박하고 거칠면서도 멋진 ‘덧배기 춤’, ‘동래 학춤’, ‘처용무’ 등의 원형 보존과 계승이 중요하다. 더하여 연구, 실험, 창작 환경도 더 많이 만들어져야 한다. 그렇게 되면 부울경 지역을 넘어 세계와 소통하는 독특한 문화유산이 될 것이다. 부산은 내 인생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던 장소요 내 생을 마무리해야 하는 곳이다. 바다가 있는 멋진 도시는 세계에서 그다지 많지 않다. 연륜을 가진 부산 국제무용제가 부산국제영화제와 함께 문화도시 부울경 메가시티의 면모를 나날이 새롭게 할 것이다. 너무 서울 같은 도시와 경쟁하려고 할 필요는 없다. 서로 다르게 차이를 가지는 발전이 좋다. 지정학적인 환경이 다르고 기질이 다르다. 그 다른 기질의 장점을 잘 살려 발전하는 그런 도시가 돼야 한다. 현대무용을 한 사람으로서, 한 시민과 국민으로서 세계적인 무용단이 부울경에 하나쯤 있으면 좋겠다.


◇남정호 단장은

▷1952년 경북김천 출생 ▷학력: 경남 마산 완월초등학교 졸업, 부산 성모여자중·고등학교 졸업, 이화여자대학교 무용과 및 동대학원 졸업, 프랑스 Rennes II 대학 DEA 이수 ▷ 경력 : 프랑스 IPAC 강사, 프랑스 장-고당 무용단 단원, UCLA 무용과 초빙교수, 일본재단 예술가 팰로우십, 프랑스 리옹콘서바토리 특강 강사, 하와이 대학 초빙교수 및 초빙예술가, 경성대학교 예술대학 무용과 교수, ‘현대무용단 줌 Zoom 창단 및 예술감독, 국립현대무용단 이사,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창작과 교수, 즉흥 춤 개발집단 ’몸으로’ 예술감독, 파리콘서바토리 특강 강사, 코스타리카대학 단자유니버시티 초빙예술가, 국립현대무용단 단장 겸 예술감독,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명예교수, 연변대학교 객좌교수 ▷대표 안무작 : ‘안녕하세요’, ‘비밀의 뜰’, ‘도시 이야기’, ‘목신의 오후’, ‘빨래’ ▷저서 : ‘맨발의 텝시코레’, ‘현대무용 감상법’, ‘남몰래 추는 춤’, ‘몸으로 상상하기’ ▷역서 : ‘뉴댄스’, ‘무용의 현대’ ▷공연 : 한국현대무용단, 부산시립무용단, 창원시립무용단, 국립발레단 객원안무, 예술의 전당 전관 개관 초청공연, ‘우리시대의 춤’(예술의 전당 기획), ‘94’ACD’ 초청강연(뉴욕 LaMaMa 극장), 학큐슈예술제 여름 솔로 발표(94~), 그린밀 댄스 페스티벌 공연(호주), 홍콩예술제 솔로공연, 아비뇽축제 한국주간 초청공연, WDA 세계무용대회 홍콩, 필리핀 초청공연, 일·중·한 PAC 안무, 한인 하와이 이민 백주년 기념 프로젝트 안무 ▷수상 : 코파나스상(한국현대무용협회), 사이따마 국제안무대회 특별상(일본), 제4회 김수근 문화예술상, 최우수 예술가상(예술평론가협의회), 이사도라상(한국현대무용진흥회), 무용교육자상(한국현대무용진흥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