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울경을 빛낸 출향인 <27> 소헌 정도준 서예작가·㈔국제서예가협회장
‘한글의 美’ 세계에 알린 서예대가 … “해외전시 통해 도약”

 

‘바라보라 저 산과 바다 저 하늘과 들판 내 역사와 전설이 고였고 대대로 누려 온 곳 조국아 내 불타는 사랑 오직 너밖에 또 뉘게 주랴’. 노산 이은상(1903~1982) 시인의 시 ‘조국아’ 중 일부다. 국보 285호인 반구대 암각화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선사시대 유적이다. 노산의 글과 선사시대 암각화를 한 화폭에 담았다. 글과 그림을 넘나드는 한국 예술계의 혁명가 소헌 정도준의 작품 ‘조국아’(2003년 종이에 먹, 235×123㎝·사진)가 바로 그것이다. 이 작품은 글(자)이고 또한 그림이다. 윗부분 거의 절반을 굵고 힘찬 글씨로 시(詩)가 자리하고 있다. 그 아래로 암각화와 이를 설명하는 글이 차지하고 있다.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글)이다. 작품을 보면 정신이 번쩍 들고 가슴이 ‘물결이 세차게 일어나는 것’처럼 흉용(洶湧)한다. 한국인으로서 정체성과 감동이 우러난다. 명징한 메시지로 대한민국과 한글의 가치를 전하는 작품은 아름답고 귀하다. 보고 듣고 느끼는 입체적 작품이라서 더 그렇다.

정 작가는 그의 작품 앞에서 정작 글씨를 쓴 자신이 아닌 글(문장)을 쓴 이를 설명하고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 길에서 한국인으로서 정체성과 한글의 조형미가 어우러졌다. 서예가로 대를 이어 명성을 누려 온 그가 어느 날 그 경계를 뛰어넘었다. 그 안에서 글이 그림이 되고 그림이 글이 되었다. 한글이 홀로서기도 하고 파편처럼 해체된 글자들로 화폭을 가득 채우기도 한다. 한글과 한자가 하나로 만나고 그 안에 역사와 정신을 새겼다. 이제 분명한 자신의 언어와메시지로 서단(書壇)과 화단(畵壇)을 하나로 오가며 산다.

정 작가는 서예가이고 붓글씨 그림을 그리는 화가이다. 그의 대표작 ‘태초로부터’와 같이 글과 그림이 태초에 하나였다. 그는 글의 원형을 찾고 본향으로 되돌린 작가다. 지난(至難)한 작업이다. 연작 시리즈 ‘태초(太初)로부터’는 ‘ㅃ’, ‘ㄱㄴ’, ‘ㅆ’, ‘ㄴㄷ’ 등을 종이에 먹으로 서너 가지 다른 크기와 모양으로 2017년에 집중적으로 썼다. 서예의 오랜 틀을 뒤집고 새롭게 자신의 작품세계를 세우는 험난한 길, 쓰되 그리는 작업을 지금도 쉼 없이 하고 있다. 천재적 서예가인 아버지와 당대 일가를 이룬 스승 사이에서 그에겐 변신의 틈이 없었다. 그 좁은 틈을 헤집고 그는 이제 대한민국의 서예를 한글과 한자로 그리고 그림으로 세계무대에 널리 알리고 있다. 한글 자음과 모음으로 천지와 우주와 세상을 그려 한글의 아름다움과 한국인 및 한국 정신의 가치와 깊이를 만천하에 드러내고 있다. 국내 11회, 해외 17회 전시회로 쉼 없이 달려오던 그는 코로나19로 잠시 멈춰 섰다. 국보 1호 숭례문과 경복궁과 덕수궁, 진주 촉석루, 합천 해인사와 울산 태화루 등 중요한 곳마다 그의 작품이 있다. 미국과 독일과 일본 등 전 세계 유명 전시관에서도 그의 작품은 빛난다. 평생의 작품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갈 꿈을 꾸는 정 작가를 지난달 27일 서울 한남동 작업실에서 만났다.

-여전히 기본과 중심은 서예다.

▶아버지는 경남 합천 출신의 서예가 유당 정현복(惟堂 鄭鉉輻, 1909~1973)이다. 일중 김충현(1921~2006)에게서 배웠다. 초등학교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서예는 내 삶이요 내 작품의 원천이다. 내게 그림과 글이 다르지 않다. 당연히 중심은 서예다. 영국의 허버트 리드 경(1893~1968)은 자신의 저서 ‘예술의 의미’(문예출판사)에서 “중국 회화에 관하여 맨 처음 깨달아야 할 일은 그것이 중국 서예의 연장이라는 점이다. 중국인에게 미의 특질이란 아름답게 쓰인 서체(書體)에 모두 갖추어져 있는 것”(124쪽)이라고 했다. 그는 대영박물관 한국관 ‘달항아리’를 소유했던 예술사가이자 시인, 문학평론가다. 다 채운 뒤 비로소 비울 수 있다. 잘 쓰려는 마음을 버려야 비로소 제대로 된 작품을 얻는다. 법을 깊이 따르고 이루어 자연스럽게 그 법을 넘어서는 순간이 자유다.

-아버지는 막내아들이 서예가의 길을 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불자(佛子)의 길을 걷던 내가 몸도 약했고 더구나 ‘그 힘든 일’을 막내인 내게 권하고 싶지 않으셨던 것 같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당연히 받을 최고상을 ‘그냥 두면 큰일 날 것 같다’고 생각하신 아버지가 상을 못 받게 한 적도 있다. 철없는 어린 시절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해 화가 났다. 내가 쓰던 붓을 잘라버렸다. 중학교 습자반 시절 아버지가 선생님의 글과 내 글을 가져오라고 하시더니 “글은 그렇게 쓰는 것이 아니다”고 한 말씀하셨다. 얼마 뒤 법첩(法帖)을 주셨다. 고등학교 때 호를 수헌(修軒)으로 주셨다. 당시에 불교적 삶을 추구하는 모습과 법당에서 안고 온 나의 태몽을 염두에 두고 계셨다. 늘 내가 출가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셨다. 도장이 필요할 때 전각을 새겨 오신 아버지로부터 새롭게 바뀐 나의 호를 보았다. 지금의 소헌(紹軒)이다. 그때는 몰랐고 철들고 아버지 돌아가시고 프로가 된 후 아버지가 서예가의 길, 아버지의 뒤를 이을 것을 허락하신 것을 알고 너무 기뻤다.

나 역시 두 딸에겐 예술은 즐기되 전업으로 하지는 말라고 했다. 결코 자녀들은 나의 길, 프로작가가 되길 원하지 않는다. 너무 어렵고 힘들다. 미술을 전공한 두 딸은 예술을 즐기며 사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짧지 않은 굴곡 많은 삶의 끝에 나는 기독교로 비로소 영육의 안착을 이루었다.

-숨 막힐 듯한 틈을 뚫고 나와 변신에 성공했다.

▶연작을 하는 것도 한글을 중심에 놓게 된 것도 모두 해외 전시를 통해서다. 국내에서만 활동했다면 얻지 못했을 결과이다. 세계적인 전시관과 전시 기획자들을 만나 도움받고 깨친 덕이다. 일찍 해외에서 배웠다면 더 빨리, 더 많은 것을 얻었을 것이다. 국내에서는 기존 틀을 벗어나 무엇을 하기가 너무 어렵다. 이 세상 누구나 고향에서는 혁명과 혁신의 행위를 이루기 어렵다. 다행히 나는 열일곱 차례의 해외 초대전을 했다. 첫 해외 전시는 1999년 독일에서 시작했다. 독일에서만 다섯 번을 전시했고 프랑스에서는 여섯 번을 전시했다. 이탈리아와 벨기에, 스위스의 유럽을 건너 미국까지 진출했다. 서와 화, 글과 그림이 함께하고 때로는 글이 그림이 되고 그림이 글이 되는 융합과 조화와 자유를 선보였다. 묘하게 소리와 글과 그림이 선과 색과 공간에서 하나가 되어 다가왔다.

-보는 것은 어디나 같다.

▶그렇다. 독일에서나 미국에서나 작품 ‘사랑’(1999, 종이에 먹, 52×65㎝)은 그들에게도 ‘사랑’으로 읽혔고 보였다. ‘천지인’(2013, 종이에 먹, 138×178.5㎝ 외 연작)은 우주로 그리고 전체 자연으로 느껴졌다. 인종은 다르고 나라가 달라도 보고 느끼는 것은 같았다. 심지어는 미국과 독일에서 동시에 전시회를 할 때가 있었다. 같은 사진 같은 작품을 대표작으로 택한 우연의 일치를 보았다. 그건 결코 우연이 아니고 진리다. 독일의 SW 방송사에서도 사랑을 택해 메인 뉴스 시간에 방영했다. 놀랐고 자신감을 얻었다.

-아버지를 생각하는 마음이 깊다.

▶아버지의 아들로서 작든 크든, 뒤에 오는 사람이 볼 때 허스럽하게 보이지 않게 하려고 애썼다. 군 복무 중에 아버지가 마지막 전시회를 부산에서 여셨다. 그때 아버지는 “네 작품도 네댓 점 내봐라”고 하셨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 생전에 함께 전시회에 참여했다. 나로 인해 아버지가 한층 더 높아질 수 있다면 더 소원이 없겠다. 1973년 2월 군복무 시절 65세의 나이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죽음은 내가 ‘프로로 나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진주성 공북문은 내가 썼고 촉석루는 아버지가 썼다. 합천 해인사 해인총림은 아버지의 작품이고 비로문은 내 작품이다. 미국 조단 슈쳐 전시관에 가면 아버지의 병풍 작품과 나의 천지인이 함께 전시돼 있다. 아버지와 함께 있는 전시와 작품이 너무 좋다.

-부울경이 다시 손을 잡으면 좋은 일이 있을 것 같다.

▶유럽을 다녀보니 작은 도시로도 참 충실한 것 같았다. 하나로 합쳐지면 그 큰 규모를 어떻게 잘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있을 것 같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규모가 있어야 할 수 있는 일도 있다고 본다. 이건희 미술관 유치 같은 것이 그렇다. 이 회장 고향이 경남 의령인 점을 감안하면 부울경이 하나의 도시였다면 이를 유치하는 데 더 유리하지 않았을까 한다. 개인적으로는 작가가 마지막 머물러야 할 곳은 고향이라고 생각한다. 언제든 고향에서 나의 작품을 모을 기회가 주어진다면 평생의 작품과 결실을 들고 달려갈 것이다.


◇정도준 작가는

▷1948년 진주 출생, 호는 소헌 (紹軒) ▷학력 : 진주중, 진주고, 건국대 경제학과 졸업, 건국대 명예철학박사 ▷국내 전시회 : 정도준 서예 초대전(서울,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 2017) 등 11회 ▷해외 초대전 : 독일 Stuttgart Kunst Academy 초대전 (1999), UNESCO Miro 갤러리 초대전 (파리, 2001), 미국 Jordan Schnitzer Museum of Art 초대전(Oregon, 2006~2007) 등 17회 ▷주요 해외 작품 소장 : 독일 바이마르 괴테박물관, 덴마크 오덴세 안데르센 기념관, 멕시코 옥타비오 파스 기념관, 영국 세익스피어 기념관, 러시아 국립 동아시아 박물관, 미국 조던 슈니처 미술관, 프랑스 칼비 시립미술관 ▷주요 작품 : 흥례문(興禮門) 현판, 숭례문 복구 상량문, 진주성 정문 공북문(拱北門), 합천 임란 창의 사적비, 의령관문, 해인사 대몽각전(大夢覺殿) 현판, 울산 태화루 현판, 해인사 비로전(毘盧殿), 독일 베를린 통일정 현판 ▷수상 : 제 1회 대한민국 미술대전 대상(1982), 원곡 서예상(19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