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울경을 빛낸 출향인 <26>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서애학회 창립학회장
평생 관직 거부한 보수논객 아이콘 “권력 비판이 학자의 일”

 

송복(84) 연세대 명예교수는 ‘보수 논객의 아이콘’ ‘이 시대의 진정한 보수’ 등으로 불린다. 평생 관직과 보직을 거부하고 지식인으로서 오직 글쓰기와 강의, 연구와 실천적 참여에 앞장서 왔다. 고인이 된 동향 선배 박영식(1988~1992) 연세대 총장 시절 박 총장은 송 교수를 부총장에 임명했다. 그러나 그는 몇 달 동안 그 방으로 출근하지 않았다.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유명한 일화다. 한때 그의 절친이자 단짝인 고건(83) 전 국무총리 등과 함께 김영삼(YS) 전 대통령 후보 자문역을 맡은 적도 있다. 그러나 선거가 끝난 후 김영삼 정권 마지막까지 정부에 대한 비판적인 글을 썼다. “같은 부울경(PK) 출신으로 YS 정권을 비판할 수 있느냐”는 비난도 감수했다. “글쓰기의 성질(性質)이 그렇다”고 단언한다. 당연히 몇 차례의 입각 제의는 물거품이 됐다.

사회학의 1세대 교수로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서른 권이 훌쩍 넘는 저술을 남긴 송 교수에게 ‘지식인의 삶’은 현재진행형이다. 국가를 이끄는 정치 리더에 관한 연구가 평생의 주제다. 수준급의 한문 솜씨는 일찌감치 고전과 우리 역사에 대한 통찰로 이어졌다. “서른이 더 지나 영어 말하기를 배운” 탓에 말하기는 좀 달려도 그의 뛰어난 영어 실력은 그를 미국 유학과 교수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자양분이었다. 대학의 졸업학점을 다 채운 서울대 정치학과 2학년 말인 1959년 ‘사상계’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1964년 월간지 ‘청맥’을 창간해 편집장을 맡기도 했다. 분당 1000자의 영어를 감당해야 하는 서울신문의 외신부 차장을 지냈다. ‘더 타임스’에서 논설위원이 되겠다던 그의 꿈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학교수의 길로 인생 지도가 바뀌었다.

격변의 시기를 연세대에서 사회학 교수로 흔들림 없이 교단을 지켰다. ‘정시(正視), 정사(正思), 정필(正筆)’의 기자 정신과 ‘가치 중립’의 학자 정신을 오롯이 붙잡았다. 정년 후 석좌교수로서 특별 초빙을 받아 10여 년 특강을 이어갔다. 서울 불광동 개인 연구실은 다소 비탈지고 휜, 좁은 길 옆의 아파트여서 두어 차례 지나쳤다. 지난 6월 17일 오전 찻잔을 기울이며 2시간반 유쾌한 대화가 이어졌다. 부울경의 메가시티에 대해서 조언을 부탁했다. “부산과 울산과 경남이 각각 잘 할 수 있는 것을 더 잘하게 하는 ‘각자도생’의 자세가 먼저 요구된다”며 지역별 특성을 살리고 이를 연대하는 ‘메타시티(Meta City)’를 역설했다. 다음 일정이 있어 “막걸리 한 잔과 점심을 먹고 가라”는 그의 호의를 뒤에 두고 오는 내내 마음이 푸근했다.

-주된 연구주제는 리더십이다.

▶정치사회학을 전공했다. 정치가의 리더십 연구가 핵심이다. 국가 정치를 이끌어 온 리더들에 대한 연구의 끝에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 1542~1607)을 만났다. 549개 상소문을 올린 난세의 영웅이다. 고전을 통해 국가와 정치 지도자의 리더십을 연구해왔다. ‘맹자(孟子)’를 보면 오늘의 중국과 북한의 앞날도 예견할 수 있다. 조선조 500년의 정치 리더를 연구했다. 2007년 11월 출판사 ‘지식마당’에서 ‘서애 류성룡 위대한 만남’을 출간했다. 12년 뒤, 2019년 12월 여든둘의 나이로 “류성룡의 삶과 사상을 연구하고 오늘에 계승”하기 위해 ‘서애학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을 맡았다.

-사회학과 교수로 정년퇴임한 지 20여 년 되었다.

▶19년 전인 2002년 정년 퇴임했다. ‘송복의 마지막 강의’라며 주요 대학 총장과 운동권 학생들까지 강의실을 가득 메웠다. 한 편에서는 반대 데모도 있었다. 곧이어 특별 초빙교수로 석좌교수가 되었다. 교수 추천위원회를 거쳐 300여 명의 당시 명예교수 중 유일하게 선택됐다. 10년간 연세대 전학생을 대상으로 강의했다. 같은 시기 후마니타스 칼리지를 개설한 경희대에서도 전교생 대상 필수 교양강좌를 강의했다. 수천 명을 수용하는 국내 최대 규모 대강당 ‘평화의 전당’에서였다.

-사회학을 정립한 1세대 학자다.

▶가난한 사람에 대한 연구에서 복지와 사회 변화를 다루는 것이 부각돼 좌파 학문으로 보는 이가 있다. 사회학은 오히려 우파 학문에 가깝다. 사회 현상을 연구하는 학자가 특별히 좌파 혹은 우파적 시각으로 접근하면 제대로 현상을 파악할 수 없다. 사회학은 생활, 정치와 경제와 사회의 관계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생명은 끝나도 관계는 끝나지 않는다. 그 관계의 연구가 사회학의 핵심이다. 가족과 친구 등 우리가 사는 세계를 연구한다. 못사는 사람도 연구하고 잘 사는 사람도 연구한다. 모든 학문은 특정 이념을 떠나 객관적 입장에서 보고 배우고 연구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가치중립’이 우선이다. 호오(好惡)와 선악과 정의와 불의에 대해 자신의 주관적 관점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사실이 왜곡되기 때문이다. 나의 삶의 근본이 가치중립에서 출발하고 모든 글과 행동 또한 그렇다.

-보수 우파의 아이콘이 되었다.

▶진보 정권을 견제할 수 있는 세력과 수단으로서 보수 우파의 편에 서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 평가를 받는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어느 시대에도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자세를 잃지 않기 위해 애썼다. 글은 잘한 것보다 못한 것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다. 글을 쓰는 이의 몫은 기득권력에 대한 비판이다. 당연히 집권 세력을 비판하게 된다. 나는 오랜 시절 기자로 살았다. 그리고 학자로서 이후의 삶을 살고 있다. 기자와 학자는 권력에 비판적이어야 하고 정치 권력이 건강하게 균형 잡히도록 약한 권력의 편에 서야 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어떤 정권이 들어서도 나는 권력의 비판자로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서예 작가 월정(月亭) 하경희와 결혼했다.

-서예의 기본은 중봉(中鋒)이다. 획을 그을 때 붓의 중심(中), 붓끝의 뾰족한 부분(鋒)이 획(선)의 중앙을 지나가도록 쓰는 것이다. 아내는 이화여대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다. 2013년 6월 ‘하경희·송복 맹자(河慶姬.宋復 孟子) 글귀전’을 출간했다. 서예에 관한 한 동갑의 아내가 스승이고 선배다. 기자 시절 나는 소설을 썼다. 같은 소설가 이모 작가와 그의 친구와 함께 만났다. 먼저 와 있던 여자가 서예 작가였다. 어린 나이에도 ‘중봉’을 가진 그의 솜씨에 매료됐다. 1년여 함께 만나면서 좋아져 결혼했다. 전시회도 같이 열고 붓글씨로 한평생을 같이 왔다. 서예는 우리 부부에게 삶의 근간이다. 내가 2005년 모 일간지에 ‘광화문’이라는 칼럼을 썼다. 유홍준 당시 문화재청장이 광화문 현판 글씨가 ‘박정희체(書體)’라며 정조의 집자(集字)화를 주장한 것을 비판한 글이다. “집자는 죽은 것이고 죽은 글자를 현판으로 할 바에는 차라리 비워두는 것이 더 낫다”고 했다.

-대한민국의 천명은 무엇인가.

▶북핵은 방어용이다. 통일은 자연이다. 하나 되는 통일은 어렵다. 우리는 분단의 역사가 통일의 역사보다 더 긴 나라다. 주역 38괘 중 ‘화택규’다. 서로 노려보는 형국이다. 통일은 폭력과 파괴와 살상으로 가능하다. 통일(統一)이 아닌 통삼(通三)을 해야 한다. 그 첫째(通一)는 정부 간 오고 가는 것이다. 둘째(通二)는 사람이 오가는 것이다. 셋째(通三)는 상품과 재화가 자유로이 유통되는 것이다. 이 세 가지가 이루어지면 된다. 우리의 역사는 통일보다 분단이 더 길고, 되풀이되었다. 남은 미·일과 손잡고 해양세력으로, 북은 중·러와 손잡고 북방으로 진출하면 된다.

-김해지역에서 400년을 살아 온 집안이다.

▶청주에서 김해로 이주했다. 김해성을 지키다 순절한 임진왜란 최초 의병장 송빈(宋賓, 1542~1592) 공의 후손으로 청주 송가다. ‘성균진사’ 송한준(宋漢駿, 1874년 김해 출생) 할아버지의 서당에서 글(한문)을 배웠다. 고 노무현 대통령의 고향 진영 옆 진례면 담안리에서 나고 자랐다. 열기불여총기(熱氣不如聰氣)라는 말이 있다. 열심히 해도 총기 있는 사람에게 못 따른다는 말이다. 어릴 때부터 총기가 있었다.

-고향 부울경이 다시 하나로 거듭난다.

▶부산 울산 경남이 각각의 강점을 살려서 제 살길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필수 전제조건이다. 인구를 늘리는 그 이상의 효과를 얻지 못한다면 의미 없다. 중앙 집권화, 지방 분산화가 동시에 진행돼온 게 우리 역사의 특징이다. 양쪽이 극과 극으로 계속 갈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합치는 것보다 각 지역이 나누어 (스스로 발전동력을 창조해) 가는 것이 더 낫다. 인위적인 지방 공공기관 이전은 별 소득이 없다. ‘각자도생’해야 잘 살 수 있다. 지방이 각자 살길을 찾아야 한다.


◇ 송복 명예교수는

▷경남 김해 출생(1937)호는 심원(心遠) ▷학력 : 부산고 졸업, 서울대 정치학과 학사·신문대학원 석사, 하와이대 대학원 사회학 석사, 서울대 정치사회학 박사 ▷경력 : 사상계 기자, 월간 청맥 편집장, 서울신문 외신부 기자·차장,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아이오와주립대 객원교수, 워싱턴대 객원교수, 연세대 명예교수(2002~), 서애학회 창립회장(2019~) ▷저서 : 특혜와 책임, 류성룡 나라를 다시 세울 때가 되었나이다, 조선은 왜 망하였나, 일류의 논리, 위대한 만남:서애 류성룡, 동양적 가치란 무엇인가?, 한국 사회의 갈등구조, 사회불평등 기능론, 사회불평등 갈등론, 조직과 권력, 볼쉐비키 혁명, 열린 사회와 보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