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울경을 빛낸 출향인 <22> 이은숙 국립암센터 전 원장·국제암대학원대학교 교수
금녀 벽 깨고 유방암 명의로 … “남은 생 고향 의료계 돕고파”

 

이은숙(59) 국립암센터 교수는 ‘흙수저’ 성공 신화의 주인공이다. 이 교수는 전깃불도 없는 산골에서 정상으로 가는 길을 뚫었다. 홀어머니 밑에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1등으로 마쳤다. 전액 장학금으로 입학한 고려대 의대를 수석 졸업하고 고려대 의대 최초의 여성 외과 전공의가 됐다. 외과는 당시만 해도 금녀(禁女)의 벽이 높았다. 임상강사(fellow) 3년 후에도 원했던 교수의 자리는 주어지지 않았다. 고려대 의대, 여자, 외과 전문의라는 3개의 벽에 가로막혔다. 처음으로 쓰디쓴 좌절을 맛봤다. 일자리도 없고 교수도 못 되는 사면초가의 처지에 빠졌다. 상상조차 못 한 일이다. 열심히 해도 되지 않는 일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겪었다.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4살과 6개월 된 두 아들을 시어머니에게 맡겼다. 주저 없이 세계적인 암전문기관인 미국 엠디앤더슨으로 달려갔다. 복강경 수술이 도입되던 초기 시절이었다. 일본계 미국인 교수 데이비드 오따에게 복강경 수술을 배우려고 갔는데 그가 도착하자 떠나고 없었다. 낯선 곳에서 홀로 길을 잃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막막한 날을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우여곡절 끝에 유전자 변형 쥐 실험실에 자리를 잡았다. 지금은 KAIST 교수로 있는 임대식 박사가 큰 힘이 되어주었다. 1년간의 실험실 생활을 통해 연구자로서의 기반을 만들고 미래를 염두에 두고 유방외과 교실로 자리를 옮겼다. 20년간 1만 명 유방암 환자를 치료하며 한국 최고의 외과 의사 반열에 오른 의료계 여걸인 이 교수의 분투기(奮鬪記)다. 모교 고려대 안산병원을 거쳐 2000년 10월 개원한 국립암센터 첫 개원멤버로 참여했다. 유방암 센터장과 연구소장을 거쳐 2017년 11월 23일 마침내 첫 여성 국립암센터 원장 자리에 올랐다. 그는 국립암센터 첫 여성원장으로 임기 3년 최선을 다했다. 꿈속에서도 일했다.

그는 계층 사다리가 있었기에 자신의 오늘이 가능했다며 자신을 키운 8할이 장학금이란다. 그간 사회와 국가로부터 받은 도움을 어떻게 갚을지(Pay back)를 끊임없이 고민한다. 인터뷰 내내 계층 사다리가 사라져 가는 우리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지난 6월 29일 오후 경기 고양시에 있는 국립암센터 검진동 10층 연구실에서 만난 그는 “부울경 의료기관이 각자의 차별적인 강점에 집중하고 연대한다면 굳이 환자가 서울의 병원으로 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어린 시절 가난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열정이 있었다.

▶경남 함안에서 태어났다.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어려운 가정환경이었지만 굴하지 않았다. 함안중학교를 1등으로 졸업하고 마산여고에 진학했다. 첫해는 함안과 마산 사이 기차로 통학했다. 터널을 벗어나면 개나리와 진달래가 가득 흐드러져 있던 그때 첫 봄날의 환희가 지금도 가끔 떠오른다. 친척이 사는 마산으로 옮겨 얹혀살며 고등학교를 마쳤다. 죽으라고 앞만 보고 뛰었다. 어차피 뒤돌아볼 처지가 못 되었다. 공부하고 또 공부한 덕에 장학금으로 3년을 마쳤다. 마산 시내 한 번 나가보지 못했고 그 유명한 아귀찜은 대학 진학 후 서울에서 맛볼 수 있었다.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고려대 의대에 전액 장학금으로 진학했다. 수석으로 마친 고려대 의대 졸업 후 최초의 여성 외과 전공의를 거쳐 전문의가 되었다. 지금까지 내 이름 앞에는 늘 ‘1등’과 ‘수석’과 ‘최초’가 수식어처럼 붙어 다녔다.

-암센터 원장으로 많은 성과 거뒀다.

▶개원 이래 누적된 불만요인을 차례대로 해결했다. 포괄임금제 등 관행이라는 미명 아래 이뤄진 시대착오적인 제도를 과감히 폐지했다. 승진 적체를 해소하기 위한 자동승급제를 신설했다. 노조의 무리한 요구에는 단호히 대처했고 설득과 협상을 통해 정부의 임금인상 가이드라인 내에서 임금협상 최종 합의를 끌어냈다. 10여 일간의 유례 없는 파업에도 2019년도 국립암센터는 46억 원의 흑자를 달성했다. 지난해 코로나 19의 확산으로 많은 병원에서 감염 노출 사고가 이어질 때 발 빠른 대응으로 국립암센터를 안전하게 지켰다. 모범적인 방역 사례로 손꼽혀 국제암연맹(UICC), 중일 국립암센터, 터키, 중남미 암센터 등으로부터 노하우 전수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 원장 재임 중 나는 유난히 낮은 국립암센터의 청렴도를 높이는 일에도 집중했다. 내부 청렴도 평가가 바닥이었다. 원장인 내가 직접 청렴교육 연수과정을 수료했다. 그렇게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았다. 그런 나에게 누군가는 “청렴도란 콩나물시루에 물을 부으면 물은 바닥으로 흘러내지만 콩나물은 자라는 격”이라며 위로했다. 원장직에서 물러난 올해 초 국민권익위원회 평가 청렴도 1등급 기관이 되었다. 국제암대학원대학교의 전문성을 강화하고 국제교류의 물꼬도 텄다. 청렴도에 이어 국립암센터 문화를 플랫폼 리더십 조직으로 바꾸려고 연임에 도전했으나 너무 아쉽게도 눈앞에서 놓쳤다.

-플랫폼 리더십에 주목했다.

▶개인의 이익을 위해 자기 자신이 드러나기보다 모두의 이익을 위해 기꺼이 다른 이들의 가교가 되고 무대가 되어주는 리더십이다. 원장 재임 3년간 ‘플랫폼 리더십’을 통해 새로운 변화를 이끌고자 했다. 직원들을 기꺼이 주인공으로 빛나게 하려고 애썼다. 직원과 벽을 허물고, 직원 간 소통을 늘리기 위해 새로운 방식을 다양하게 시도했다. 기꺼이 구성원의 뒤에서 그들을 주도적인 자리로 세웠다. 국립암센터는 암 연구와 암 진료, 암 정책, 그리고 교육과 홍보는 물론 암 빅데이터를 통한 헬스케어 플랫폼 구축으로 AI와 4차 산업혁명의 기반이 되어야 한다. 국가 예산으로, 국가 정책으로 이루어진 모든 연구와 진료 결과는 유관 대학과 연구기관과 연구자와 산업 전반에 공유돼야 하고 적극적으로 개방돼야 한다. 그런 면에서 국립 암센터 원장 이하 모든 구성원에게 요구되는 리더십은 플랫폼 리더십이다.

-고대 의대 출신 첫 여자 외과 의사다.

▶의대 시절 스승 황정웅 교수는 미국 전문의 자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여자 의사인 나를 고려대 첫 외과 수련의로 선발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러나 외과 교실 내에서 갑론을박이 끊이지 않았다. 투표를 거쳐서야 가까스로 선발되었다. 외과 전문의 수련 과정 중에 몇 번이고 그만두고 싶었다. 그러나 첫 여자 외과 수련의로서 뒤를 이을 여자 후배의 길을 막을 것 같아 도저히 그만둘 수 없었다. 고민 끝에 인구의 절반인 여자 환자가 남자 의사에게 진료받는 데 불편할 것 같아 대장항문의 복강경 치료를 택했다. 마침 복강경 수술이 첫 도입된 시기였다. 임상강사 3년 내내 전공의 때와 별다를 것 없이 온갖 궂은일을 다 하며 보냈다. 서울 혜화동에 있던 병원이 안암동으로 750병상 규모로 확장해 옮겼다. 몸집이 커진 신설 병원의 무게와 짐을 감당해야 했다.

-유방암 전문의로 평생을 살아왔다.

▶여자로서의 강점을 살리고 싶었다. 엠디앤더슨 유방 분야 싱글테리 박사로부터 배웠다. 그 무렵 같은 병원 핵의학 파트에 있던 김의신 박사가 소개했다. 1995년부터 2000년까지 고려대 안산병원에 근무했다. 중간에 2년 정도 미국 노스웨스턴대학 암센터에 연수를 다녀왔다. 2000년 11월 국립암센터 개원 요원으로 합류했다. 실질적인 원년 멤버다. 박재갑 초대 국립암센터 원장이 유방암 분야로 이끌어 주었다. 이곳에 와서 유방암을 시작했고 유방암센터와 함께 성장했다. 지난 20년간 매월 최소 50건의 유방암 수술을 했다. 파괴(행위)를 싫어한다. 그래서 가능한 유방을 보존할 수 있는 길을 택했다. 유방의 피부와 유륜(乳輪)을 보존하면서 유방 실질 조직을 제거하고 보형물을 넣어서 재건하는 방식을 택한다. 선행화학요법을 주로 쓴다. 수술 부위를 줄인 후 수술하므로 절개 부위가 작다. 그만큼 기존 유방 모양을 최대한 유지할 수 있다. 유방암 환자의 수술 후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부단히 애쓴다. 가능하면 보존하고 원형을 살린다.

-퇴직 후 고향으로 갈 수도 있다.

▶고향 의료계를 돕고 싶다. 가서 무엇이든 해주고 싶다. 와서 배우겠다면 열심히 도와줄 것이다. 그런데 지역에서의 한정된 성공에 도취해 완고하고 폐쇄적인 중진의 모습이 적지 않다. 나이와 이제까지의 성공을 던져 버리면 좋겠다. 오히려 다가서기가 어려울 때가 많아 안타깝다. 이 자리에서 정년을 맞지는 않을 것이다. 기회가 되면 부울경 지역에 유방암센터를 열어 국제적인 수준의 진료와 연구와 산병학(産病學) 공동사업에 이르기까지 10년 정도 남은 생엔 고향 의료 발전에 기여하고 싶다.


◇이은숙 교수는

▷경남 함안 출생(1962) ▷학력: 마산여고 졸업, 고려대 의대 외과학 학사, 동대학 외과학 석사 및 종양외과학 박사 ▷경력 : 고려대 안암병원인턴, 외과전공의, 임상강사, 외과전임강사, 조교수, 안암병원 유방내분비외과 교수, 미국 엠디앤더슨암센터 박사후 과정, 미국 노스웨스턴 의대 로버트 루리애 암센터 교환 조교수, 암정복추진기획단 암 진단 및 치료기술개발분과 위원, 암 정보 및 교육홍보분과 위원, 암 역학예방 및 조기진단분과위원, 국립암센터 유방암센터장, 암 예방검진센터장·유방내분비암과장, 융합기술연구부장, 연구소장·유방암센터교수, 면역세포사업단장, 제7대 원장·발전기금 이사장·국제암대학원대학교 제3대 총장, 국제암대학원대학교 교수 ▷학회 : 의료기기원회 위원, 대한외과학회 총무이사·감사, 한국유방암학회 부회장, 대한암학회 이사·상임이사, 대한민국 의학한림원 정회원(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