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울경을 빛낸 출향인 <24> 이인실 한국여성발명협회장·청운국제특허법인 대표변리사
불어 전공한 첫 변리사 … 국제 특허전쟁서 국익 신장 앞장
발걸음은 길에 흔적을 남긴다. 눈 위로 처음 디딘 발자국은 다른 사람의 길이 된다. 아침 눈길을 걷는 사람은 뒤에 오는 사람을 위해 그 발자국을 어지럽히지 말아야 한다. 이를 노래한 서산대사의 ‘답설가(踏雪歌)’는 리더십의 핵심을 담고 있다. 어느 자리 어떤 리더에게도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정도(正道)다. 이인실 청운국제특허법인 대표변리사는 주요 직책을 맡아 한 취임사에서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취가 반드시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라는 것을 잊지 않고 일하겠다”며 ‘답설가’를 자주 인용한다.
이 대표는 부산대 출신 첫 변리사다. 불어불문학을 전공한 최초 변리사다. 한때 불어불문과 출신의 변리사 시험 참가 열풍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한국의 세 번째 여성 변리사다. 현재 한국여성발명협회장과 지식재산포럼 회장을 맡고 있다. 그는 1985년 변리사가 된 뒤 김&장 법무법인에서 10년 일했다. 그리고 10년 단위로 자기를 비우고 새롭게 채우는 시간을 가졌다.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고 1996년 귀국 후 개업했다. 그가 대표 변리사로 있는 청운국제특허법인이다. 다시 10년 후 미국에 유학했다. 한국여성변리사회장, 전문직여성 한국연맹회장, 전문직여성 동아시아 의장, 국제 변리사연맹 한국협회장 등 다양한 분야에서 리더십을 발휘했다.
프랑스와 미국에서 두 번의 변리사 전문 양성 법학석사 과정을 마쳤고 현지 로펌에서 실무를 익혔다. 불어와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한다.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법학석사 학위를, 고려대 대학원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마쳤다. 그의 주된 연구는 ‘특허쟁송(特許爭訟)’. 실무와 이론까지 두루 갖추었다. 이제는 더욱 치열해져 가는 국제 특허전쟁의 무대에서 국익을 지키는 일을 하고 있다. 여성이 경제 주체로 성장하도록 돕는 일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제 리더로 왕성한 활동을 하는 이 대표변리사를 지난달 14일 오후 서울 서초동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부울경의 미래에 대해 “변리사가 많이 모이고 바빠질 때 그 도시의 비즈니스는 활력이 넘친다. 세계 각국의 변리사가 앞다퉈 모여드는 부울경 메가시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스스로 길을 열고 만들어 왔다.
▶그렇다. 어릴 때는 헬렌 켈러의 이야기에 감동하고 베토벤 같은 위대한 작곡가의 삶을 존경했다. 이제는 스스로 길을 열고 만들 수밖에 없다. 어른이 되어서 여러 역할과 책임을 맡으면서 조직 구성원과 후배에게 모범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왔다. 지금도 전문직 리더의 국제무대 진출, 특허와 지식재산 관련 제도와 정책이 세계무대에서 당당히 자리 잡도록 노력하고 있다. 아울러 여성 경제인이 기존 전통산업에서 지식재산을 통한 고부가 가치를 생산하는 사업을 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정책 개발과 정부 지원을 끌어내고 회원의 제품을 들고 홍보하러 뛰어다닌다. 나의 리더십은 말하자면 ‘조각보 리더십’이다. 개개인이 각자에게 주어진 일을 제대로 알고 행하게 한다. 그다음 그 조각을 모두 모아 하나로 이끌고 만든다. 굳이 구성원에게 전부를 두고 고민하게 하지 않는 반면 내가 리더로서 그 전부를 한곳에 모아 해결책을 찾고 답을 만든다. 인생의 롤 모델을 물었는데 솔직히 없다.
-불어불문학을 전공하고 변리사가 됐다.
▶돌아보면 나의 인생은 프로스트가 시(詩)에서 읊은 것처럼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도전의 연속이었다. 부산대 문리대 어문계열에 입학해서 2학년 때 학과를 선택할 때도 많은 이가 선호한 영어영문과 대신 불어불문과를 선택한 것도 그런 성향이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생각한다. 불문과를 졸업할 무렵 교직과목 이수만 하면 교사가 되는 길은 거의 자동이었다. 그 시절 여자에겐 학교 교사만큼 매력 있는 일터도 거의 없었다. 나는 많은 (불문학과) 동기들이 가지 않은 길을 택했다. ‘시험 잘 치는 재주’를 살려 한 해만 눈감고 변리사 시험에 도전하기로 했다. 서울법대생으로 사법시험에 매진하는 오빠의 뒷바라지도 힘겨웠던 어머니를 “딱 1년만”이라며 설득했다. 변리사 선발은 시험 주기도 선발 인원도 불규칙했다. 우여곡절 끝에 1985년 국내 여자로는 세 번째 변리사가 됐다. 돌이켜 보면 자주 전학을 다닌 어린 시절이 힘들고 낯설었지만 가지 않은 길, 새로운 일에 도전하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10년마다 자신을 새롭게 채웠다.
▶첫 직장이었던 김&장 법률사무소에서 밤낮없이 일만 하느라 방향을 놓쳤다. 재충전이 필요했다. 대학에 가서 공부를 더 하려고 했더니 변호사인 남편이 “한국에서 공부가 제대로 되겠느냐”고 반문했다. 갑작스럽게 유학을 생각했다. 그때가 첫 직장 근무 후 10년 되는 때였다. 고심 끝에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시에 있는 로베르 슈멩 대학교 국제지식재산센터(CEIPI)에서 1년간 학위 과정을 하기로 했다. 떠나기 전 아침마다 프랑스어학원 선생님의 전화와 팩스 지도를 받으며 불어를 다시 배웠다. 4살과 7살 두 딸을 남편에게 맡겨 두고 떠났다. 졸업 후 다시 파리 로펌에서 6개월간 근무하고 귀국했다. 홀로 떠난 유학 생활, 원 없이 공부하고 후회 없이 여행하며 지식과 견문을 넓혔다. 돌아와 개업했다. 개업 10년쯤 되니 웬만큼 자리 잡았다. 나를 더 채워야 한다는 각오가 새로웠다. 다시 미국으로 떠났다. 이번에는 아이 둘을 데리고 갔다. 이래저래 불공정하다는 남편의 불만 섞인 소리를 뒤로하고. 한국에서 가장 가까운 시애틀을 택했다. 워싱턴대 법학석사(LL.M) 과정을 마친 후 6개월을 현지 로펌에서 일했다. 수업을 듣고 아이를 돌보느라 4만 마일을 운전했다. 두 번의 유학을 통해서 인간은 한계 없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알래스카도 못 가봤고 대륙횡단도 못 했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전문직 여성계에서 활약상이 두드러진다.
▶프랑스 유학이 계기가 됐다. 돌아온 뒤 전문직여성 한국연맹(BPW Korea)에 회원으로 가입했다. 여성이 조직과 단체를 통해 힘을 합해 사회의 변화를 끌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같은 해 한국여성변리사회 회장직을 맡았다. 미국으로 떠났던 2차 유학은 나를 국제무대에서 더 많은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2008년 국제관계위원장으로서 전문직여성연맹 2014년 세계총회를 한국에 유치했다. 총회 개최 전 2013년 전문직여성 한국연맹 회장에 취임해 28차 제주 세계총회를 역대 최고라는 찬사 속에 마쳤다. 총회의 성공적 개최에 힘입어 임기 3년의 동아시아 의장에 취임했다. 2015년에는 국제변리사연맹 한국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한국 대표로 매년 2회 국제 이사회에 참석해 한국의 법 규정과 실무 현황을 보고하고 토의했다. 지금은 여성발명협회장과 지식재산포럼회장을 맡고 있다. 여성 발명가가 아닌 변리사로서 최초 여성발명협회장이 되었다. 세계지식재산기구(WIPO) 회의와 유엔의 여성지위위원회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고향에서 이사가 잦았다.
▶어릴 적 부산과 서부 경남 일대 합천, 창녕, 함양 등지에서 살았다. 공직자인 아버지의 임지(任地)를 따라다닌 탓이다. 함양초등학교를 가(假)입학한 뒤 창녕초등학교에 입학해 4학년 초까지 다녔다. 부산 동래의 유락초등학교(지금은 유락여중으로 바뀌었다)에 4학년 초에 전학해 금사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잦은 전학으로 처음 간 날 교실에서 마주한 그 어색함이 지금도 생각난다. 중학교부터 대학까지는 줄곧 부산에서 다녔다. 친가는 합천이고 외가는 창녕이다. 방학이면 합천과 창녕에서 거의 지냈다. 그래서 시골에서 보낸 추억이 많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대학 친구와 여행도 하고 카톡도 나누며 아주 활발하게 만나고 교류한다. 2남 2녀 중 막내다. 언니와 어머니는 부산 해운대에서 산다. 오빠들은 서울에 있다. 올해 구순이 되신 어머니는 아주 건강하다. 최근 부산출향과학기술인협의회 세미나로 부산에 다녀왔다.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어머니를 찾아뵈려고 노력한다. 당연히 부산에서 하는 강의나 미팅은 주저하지 않는다.
-고향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실현 가능한 목표를 설정하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지방이 가진 어려움이 많은 것은 안다. 그렇다고 포기하면 안 된다. 가능한 모든 시도를 통해서 모자란다고 생각되는 것을 채우는 데 노력하기를 응원한다. 우리는 모두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다. 부울경 나름의 특별한 도전 유전자도 있다. 절실히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찾아내어 애써 노력한다면 의외로 찾고자 하는 길이 쉽게 열릴 수 있다. 몇 차례 실패로 좌절하지 말고 더 이상 할 수 없을 정도에 이르렀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수백 번이라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이인실 대표변리사는
▷부산 출생(1961) ▷학력: 부산 금사초등, 브니엘중, 동래여고, 부산대 불어불문학과 졸업, 이화여대 법학석사, 로베르슈멩 대학원 CEIPI 졸업(지식재산권법-CEIPI), 미국 워싱턴대 로스쿨 졸업, 고려대 법학박사 ▷경력 : 청운국제특허법인 대표 변리사(현), ㈔한국여성발명협회장(현), ㈔지식재산포럼 회장(현), 국제발명가협회연맹(IFIA) 이사(현), 계원예술대 특임교수(2016~2018), 국제변리사연맹 한국협회장(2015~2018), 한국여성단체협의회 부회장(2015~2018), 전문직여성(BPW) 세계연맹 동아시아 의장(2014~2017), 대통령 소속 국가재산지식위원(2013~2015), 대통령 직속 규제개혁위원(2015~2017), 전문직여성 한국연맹 회장(2013~2015), 산업통상자원부 무역위원(2008~2014), 특허청 산업재산권 분쟁조정위원(2000~), 한국여성변리사회장(1999~2003) ▷상훈 : 철탑산업훈장(2015 제 52차 무역의 날), 신지식특허인(2001 특허청)
댓글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