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울경을 빛낸 출향인 <36> 정영수 CJ 글로벌 고문
지구 150바퀴 돈 수출 역군 “이젠 전국 돌며 노하우 전수”

 

오늘의 대한민국은 세계를 무대로 수출입국을 일궈낸 기업인들의 도전이 있었다. 정영수(75) CJ 글로벌 고문은 1970년대 해외 진출 기업의 산증인이다. 정 고문은 ㈜한국마벨의 홍콩 주재원 5년, 싱가포르 법인장 3년 근무 후 39살 젊은 나이에 현지에서 ㈜진맥스를 창업했다. 진맥스는 ‘진주 사람인 그가 회사를 크게 만들어 보겠다’는 의지를 담은 이름이다. 1억 불(달러) 수출을 넘어 성공적으로 키워냈다. 세계에서 기업 생존경쟁이 가장 치열한 싱가포르에서 이룬 성과다. 맨손으로 창업해 한국기업의 비디오와 오디오 테이프를 동남아와 전 세계에 팔았다.

그가 흘린 땀방울은 300만 마일 지구를 150바퀴 돈 그의 비행 거리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그렇게 숨 쉴 틈 없이 ‘졸면 죽는다’는 일념으로 기업을 일궜다. 정 고문은 동남아 주요 국가의 정상들과 오랜 인연을 이어오며 대한민국 민간 외교관의 역할도 톡톡히 수행하고 있다. 전 세계 800만 해외 교민과 교민 기업가를 이끄는 ‘한상(韓商) 리딩 CEO’로 그의 활동이 미치지 않은 곳은 없다. 한 해 4, 5개월을 지금도 어김없이 모국 대한민국을 찾아 기업 현장에서 자신의 경험을 나누고 있다.

정 고문은 해외에서 45년여 살면서도 자녀 모두를 세계 속의 한국인으로 훌륭하게 키워낸 해외 한인 기업인으로 유명하다. 해외교민 대부분에게 숙원사업은 모국을 떠나 사는 자녀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성공하는 것. 그래서 그의 자녀 교육 스토리는 회자된다. 그가 자녀에게 한글과 한국을 집요하게 교육시킨 노력 덕분이다. 맏딸 세은 씨는 싱가포르 CNA의 간판 앵커로 활약했다. 둘째 지은 씨는 대기업에 근무 중이고, 막내인 종환 씨는 CJ그룹 미주본부장이다. 그의 아내 이경후 씨는 CJ그룹 이재현 회장의 맏딸이다.

정 고문은 해외 생활에도 고향을 찾고 또 찾는 ‘진주 사랑꾼’이다. 할머니는 꽃이 만개한 태몽을 꾸고 그를 영락(英樂)이라는 아명으로 불렀다. 그는 일흔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어릴 때 그 이름 따라 여전히 꽃을 사랑하고 글을 사랑하며 살고 있다. 매주 일요일이면 어김없이 아내를 위해 꽃을 산다. 비행 여행으로 세 번이나 죽을 뻔했다. 숨길 수 없는 여행가의 본능을 가졌다. 정 고문을 지난달 2일 서울시 중구 필동의 CJ인재원 그의 집무실에서 마주 앉았다. ‘진주인상’을 받고 며칠 지나지 않은 때였다.

-도전의 연속 삶인 것 같다.

▶나는 수학은 잘했으나 영어는 잘못했다. 아버지가 공무원 출신으로 진주에서 중앙극장을 운영했다. 고2 때부터 흑백TV 등장으로 극장경영이 어려웠다. 진주 시내 3개의 영화관 중 유일한 개인극장으로 2본 동시상영으로도 관람객이 없었다. 그때부터 (형제도 많고) 사업의 길을 어렴풋이 생각했다. 서울대 상대에 떨어지고 2차 한국외국어대 영어과도 탈락했다. 부산 양정의 군수기지사령부 부관부에서 군 생활을 시작했다. 주월사령부 부관부 파병에 지원했다. 영어를 배우러 갔다. 대학을 졸업하고 1973년 TV, 전자계산기, 스피커 등을 만드는 ㈜한국마벨(대표이사 김용태)에 입사했다. 수출 18위 기업이었다. 1977년 홍콩 주재원으로 5년 근무했다. 홍콩에 갈 때 우리나라 전체 수출이 100억 불 규모였다. 지렁이 팔고 가발 팔던 때다. 1981년 싱가포르 법인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비행 여행을 즐겨 늘 일을 여행으로 만들었다. 대학 2학년 여름방학 귀경길에 진주에서 서울까지 처음으로 대한항공에 탑승했다. 내려 올 때는 기차로 12시간이 걸렸다. 다낭에서 호찌민으로 이동한 군용기는 바닥에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회사 근무 초기에 한 달에 한 번 서울과 부산을 오갔다. 1977년 홍콩 주재원으로 해외에서의 삶을 시작했다. 1985년 바이어와 상담하기 위해 싱가포르에서 서울 경유 20시간 비행 여행을 했다. 1994년부터 4년간 미국 여행을 많이 했다. 둘째 딸과 (막내)아들이 보스턴에 유학할 때다. 40대 중반에서 60대 중반까지 동남아는 물론 북미 남미 유럽 중동 러시아 등 전 세계를 누볐다. 물은 흘러가고 자갈만 처져 여태 (모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이창희 새한미디어㈜ 회장의 도움으로 사업의 기반을 다졌다.

▶전자전시회에 가서 에이전트가 없던 새한미디어㈜를 만났다. 잘되면 뺏길 수 있는 대리점이 아닌 자체 브랜드로 나섰다. 공장도 없이 다른 경쟁자보다 곱절의 고생을 기꺼이 감수했다. 새한미디어 이창희 회장은 오히려 그런 나에게 우호적인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유일한 재산인 집을 담보로 잡아 첫 거래를 열어주었다. 7000만 원짜리 집을 2억 원에 잡아 외상을 준 것이다. 1984년에 시작해 1991년도 매출 1억 불(비디오, 오디오 테이프, 원료-팬케이크)을 달성했다. 물건이 없어서 못 팔기도 했다. 영국 메모랙스사 200만 개 물량을 대신 공급할 때는 원료(팬케이크) 수입과 완제품 수출 마진의 이중 수익을 얻을 수 있었다. 크리스마스 앞두고 주문을 빠트려 당황했을 때 비행기로 물건을 실어 보내 준 이도 이창희 회장이다.

-끔찍한 비행기 여행도 있었고 전 재산을 다 날리기도 했다.

▶1987년 파키스탄에 비디오테이프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비행기를 탔다. 카라치에서 라호르를 거쳐 이슬라마바드로 가서 32인승으로 갈아타고 히말라야 K2 가까운 비자왈로 향했다. 칠흑 같은 밤에 몰아치는 천둥과 비바람에 비행기는 1시간 이상 심하게 요동쳤다. 극도의 불안감에 탈진했다. 1992년 미국 그랜드캐넌을 여행할 때 8인승 경비행기에 올랐다. 갑작스러운 엔진 이상으로 비행기 동체가 크게 흔들렸다. 2013년 5월 미얀마 양곤에서 수도 네피도로 가는 16인승 프로펠러 비행기를 탔다. 탑승 후 1시간 지나 엔진에 불이 붙었다. 온몸의 피도 얼어붙었다. 1985년 일본과 미국의 제품 경쟁이 치열했을 때가 가장 힘들었다. 홍콩 지사장 시절 모은 전 재산에 융자 30만 불을 포함 55만 불을 1년 반 만에 다 날렸다. 야반도주 유혹을 이기며 3개월간 불면의 밤을 보냈다. 온 가족이 힘들었다. 그래도 살면서 상상하고 계획한 것의 90%를 달성했다.

-국내외에 폭넓은 인맥을 구축했다.

▶절친인 전 고려대 이기수 총장은 진주중학교 동기다. 동아일렉콤의 이건수 회장은 형 같은 존재다. 국내 메이저 방송사의 임원을 역임한 죽마고우 이두표가 있다. 김수일 아시아·태평양관광기구 사무총장은 한때 직장 동료였다. 미국 이상주, 비엔나 박종범, 태국 전용창 등 세계 곳곳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지도자와 좋은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한국인 최초 싱가포르 국제상공회의소 이사와 ‘싱가포르경제인연합’ 국제담당 부회장을 역임했다. 글로벌 네트워크로 확장 할 수 있었다. 2013년 베트남 정부로부터 수교문화훈장을 받았다. 베트남 쯔엉떤상 주석, 태국 탁신 전 총리 가족과 잉락 친나왓 총리, 미얀마 떼인 세인 대통령, 말레이시아 전 총리 마하티르, 인도네시아 메가와티 대통령 등을 만났다. 싱가포르의 리콴유 전 수상, 고촉통 전 수상과 두터운 친분을 유지해왔다. 내가 만난 분 중 가장 존경하는 분을 꼽으라면 단연 리콴유 전 수상이다. 그의 아들 리셴룽 총리와도 몇 차례 만나 식사를 함께했다.

-세 자녀를 모두 ‘세계 속의 한국인’으로 훌륭하게 길러냈다.

▶아버지의 교육 덕에 나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진주사람으로서의 자각이 컸다. 자녀를 자랑러운 한국인으로 제대로 길러야 하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7남매의 장남으로 형제와 고향과 함께 관계의 끈을 놓지 않으려 최선을 다했다. 고향 떠난 45년간 아버지 생일과 음력 설에 고향 진주를 찾았다. 단 한 번도 빠트리지 않았다. 싱가포르로 이사하며 아이들을 부모님 계신 고향 진주에 모두 보냈다. 4개월간 우리 말과 글을 배우고 한국 문화에 자연스럽게 적응하는 시간을 갖게 했다. 일 년에 두 번, 방학 때마다 꼭 한국에 보내 민족의 문화와 정서를 직접 체험하고 익히게 했다. 내가 앞장섰다. 매일 일찍 퇴근해 아내와 아들딸과 함께 한글 성경을 통째로 소리 내어 읽었다. 고향 어른들과 생활하면서 그 속에서 살아 있는 예의와 사랑을 느끼고 배우게 하고 바둑과 서예 등도 배워 전통문화의 소양을 쌓게 했다.

-부울경 메가시티가 본격 출범한다.

▶부산에 친구가 많다. 10월 26일 부산외국어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왔다. 옛날에는 경상도였다, 경상남북도로 갈라졌다가 다시 지금의 부산·울산광역시와 경상남도로 나누어졌다. 문화도 같고 역사도 비슷하니 힘을 합쳐 국가발전에 기여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부울경의 통합 노력을 적극 지지한다. 개인적으로는 낙후된 산청 함양 하동 등 서부 경남 발전에 부울경의 통합이 좋은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정영수 고문은

▷호는 延堂, 1946년 진주 출생 ▷학력 : 진주중, 진주고, 한국외국어대 무역학과 및 동대학 무역대학원 졸업 ▷경력 : ㈜한국마벨 수출부 입사·홍콩지점수출차장·싱가포르법인장, ㈜진맥스대표이사회장, 싱가포르한인회장, 한국싱가포르학교재단이사장, 아태지역한인총연합회장(22개국), 한국상공회의소(싱가포르) 회장, 싱가포르(SICC) 국제상공회의소이사, 싱가포르(SBF) 경제인연합회이사, CJ그룹 글로벌 경영고문(2009~), 해외한인무역협회(OKTA) 상임고문(2011~), 세계한인언론인협회총재, 글로벌한상드림이사장(2020~),세계한상대회리딩CEO포럼공동의장(2021~)

▷수상 : 수출포장(무역의날, 1991) 국민훈장모란장(세계한인의날, 2009) 베트남문화훈장(베트남정부, 2013) 자랑스러운 한국인대상(한국언론인연합회, 2017) 진주인상(2021) ▷저서 : 멋진 촌놈, 아시아지역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