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울경을 빛낸 출향인 <17> The 조은 합동법률사무소 조현욱 대표 변호사
여성·아동 인권 증진 앞장 … 사법 약자 편에서 공익 변론
The조은합동법률사무소 조현욱 대표 변호사는 판사 시절, 자신이 내린 결정이 정의에 부합하는 판단인가를 늘 고민했다. 형사재판을 담당할 때 피고인을 보면 ‘한평생 멋지게 살아보고 싶었을 텐데 피고인의 자리에 서 있구나’하는 생각에 연민의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재판을 통해 법이 허용하는 안에서 새로운 인생의 전환기를 만나게 되길 빌었다. 혹시나 잘못 판단하는 일이 없도록 기록과 증거를 여러 번 반복해 읽고 또 읽었다. 밤이 이슥하도록 재판 서류를 살펴보고 정리하느라 아이들을 돌아볼 여력이 없었다. 기록이 아닌 현실 속에서 직접 당사자의 목소리를 듣고 정의를 찾으려는 목마름으로 법복을 벗었다. 한국여성 변호사회 아동학대피해자지원특별위원회 초대 위원장이 됐다. 아동학대 사건을 법률 지원했다. 아동학대의 심각성과 문제점에 관해 목소리를 높였다.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법률 개정으로 이어졌다. 그래도 아동학대가 계속되는 뉴스를 접할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아동은 독립된 인격체이다. 아이를 바르고 건강한 사회인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것은 개별 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최고의 애국적 행동이다.
한국여성 변호사회장 시절 여성 인권과 아동 인권 증진사업, 다문화 가족 및 이주여성들의 인권 보호, 위기 청소년 회복 및 지원사업을 했다. 디지털 성폭력, 불법 촬영 범죄의 심각성에 대한 문제 제기와 함께 피해자가 겪는 정신적 후유증에 관한 사회적 인식을 환기시키느라 애썼다. 판례 분석을 통해 양형에 경종을 울렸다. 지난 1월 대한변호사협회 70년 역사상 최초로 여성 변호사로 회장에 도전했다. 결선투표에서 아쉽게 패했다. 두 달 가까이 전국을 순회한 열기가 채 식지 않은 그를 지난달 7일 오후 서울 서초구 법조타운 사무실에서 만났다.
-좋은 판관은 역사를 남긴다.
▶훌륭한 판사는 공정하고 균형감각을 갖추어야 하고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며 끊임없이 연구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하나의 판결이 기업 현장에서 안전의 기준을 마련하고, 인생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사람을 새로운 희망으로 다시 일어서게 한다. 그래서 사건 하나하나를 소홀히 대할 수가 없다. 일하다 보면 어느덧 자정이 되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기록을 한 번 보고 또 더 자세히 보면 처음 볼 때와 전혀 다른 새로운 진실이 눈에 들어오기도 한다. 요즘 들어 점점 정치적 이슈가 법원 검찰에 사건으로 접수되고, 그 결론에 대해서도 정치적으로 해석해 분열되는 상황이 안타깝다.
-이태영(李兌榮·1914~1998, 평북 운산 출생) 박사가 법조인으로 이끈 스승이다.
▶이 선생님은 평생을 여성의 권익과 인권 향상을 위해 애쓰신 분이다. 중학교 2학년 무렵 우연히 잡지 ‘샘터’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변호사이신 이 선생님에 관한 인터뷰 기사를 읽었다. 운명적 만남인 셈이다. 그 후 법조인에 대한 꿈을 키우며 학업에 정진해 고3 때 학력고사 부산 경남지역 수석을 차지했다. 1983년 서울대 법대에 진학했다. 대학 2학년 때 직접 서울 여의도 가정법률상담소에 가서 이 선생님을 만나 뵙고 상담소 일을 도와드렸다. 대학 3학년 법사상사 과목을 수강할 때 이 박사님으로부터 살아온 인생 이야기를 듣고 그 내용을 보고서(과제물)로 제출하기도 했다.
-법률구조공단에서 10년을 보냈다.
▶사법연수원 수료 후 판검사로 일하는 대신 법률구조공단에서 사법 약자를 위한 공익 변론을 했다. 어려운 가정형편 속에서 성장해 가난한 이웃에 대한 막연한 동질감이 있었다. 사법시험 최연소 합격(28회, 1986년) 때 여러 방송의 인터뷰에서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 봉사하는 법률가가 되겠다”고 약속했기에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마음도 있었다. 경제적으로 소외된 사람 곁에서 걸었던 10년은 나의 삶에서 가장 보람된 시간이었다. 서울본부 및 전국 여러 곳에서 근무했다. 공장에서 임금을 못 받은 직원, 사랑을 바쳐 결혼했지만 혼자 아이와 남게 된 여성의 어려운 사연, 대규모 축사의 폐수로 농사를 망친 농민 등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이웃의 고통을 법률적으로 지원하며 함께한 소중한 시절이었다. 감사하다며 살구를 따 온 사람, 옥수수를 보낸 사람, 여성복 만드는 공장에 근무하며 옷을 지어 보낸 사람 등 사람의 온기를 느낄 수 있어서 변호사로서 많은 보람을 느꼈다.
-로스쿨(법학전문대학원) 시스템에 대한 여론이 분분하다.
▶올해 1706명이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로스쿨 출신 변호사는 지속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이들이 변호사 업계의 중심이 되고 있다. 법조 시장의 수용 능력을 넘어선 변호사 시험 합격자 배출로 청년변호사가 취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국가적으로 귀한 인재가 낭비되는 측면도 많다. 변호사 시험 합격자 수를 시장 규모에 맞게 결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합격자 수를 두고 논쟁하기 이전에 로스쿨 시스템에 관한 근본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 각 고등법원 권역별로 로스쿨을 통폐합하고 입학 정원을 줄이되 입학 이후 정상적으로 과정을 따라가면 시험 합격에 큰 무리가 없도록 해야 한다.
-The 조은 합동법률사무소에서 변호사의 길을 걷고 있다.
▶판사는 수사기관이 만든 형사 기록과 공판 절차 또는 원고와 피고의 주장 및 제출증거 속에서 누구의 말이 더 신빙성이 있는가를 판단하고 결정을 내린다. 부동산 전문 변호사이지만 특정 분야에 치우치지 않고 민사 형사 행정 가사 등 다양한 사건을 처리하고 있다. 최근 기억에 남는 사건은 고은 시인이 최영미 시인을 상대로 한 사건에서 공익변론을 맡아 승소한 사건이다. 그 외에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를 대리하기도 했다. The 조은 합동법률사무소는 규모는 작지만 실력과 열정으로 뭉친 ‘강소(强小) 법률사무소’다. 홈페이지 홍보 등을 하지 않아도 한 번 인연을 맺은 고객은 꾸준한 고객이 되고 있다.
-어렵고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다.
▶원래 전북 순창군 풍산면 시골에서 태어났다. 눈이 많이 내렸다. 겨울 아침, 일찍 일어나보면 늘 아버지는 커다란 가마솥에 쇠죽을 끓이고 계셨다. 아버지 곁에서 온기를 느끼며 재잘재잘 떠들어 댔다. 신작로를 걸어 이웃 마을을 지나야 초등학교가 있었다. 학교를 파하고 돌아오는 길에 도랑에서 물고기 네댓 마리를 잡아 신발 두 짝에 담아 들고 맨발로 집으로 오곤 했다. 다섯 살 때 아궁이 앞에서 어머니가 흙가루를 평편하게 한 뒤 그 위에 부지깽이로 한글을 가르쳐 주셨다. 여름에 폭우가 내리면 하늘에서 떨어졌는지 길 위에 미꾸라지가 살아 펄떡거렸다. 초등학교 1학년 가을쯤 일이다. 등잔불 밑에서 숙제를 하다가, 처음으로 전깃불이 들어왔다. 얼마나 신기하던지…. 초등학교 3학년을 마치고 부산으로 이사했다. 자식들 공부를 위해 부모님은 온갖 가재도구와 추수한 곡식까지 이고 지고 부산으로 왔다. 어머니는 그때 낯선 도심의 골목을 누비며 왕골돗자리와 고구마 등을 머리에 이고 다니며 팔았다. 더 팔 것이 없어지자 어머니는 범일동 신발공장 직공과 식당 종업원으로, 아버지는 조경농원의 인부로 나섰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입학하자 가정 형편이 어려운 것을 알게 된 1학년 담임 선생님께서 학교에서 학생신문을 팔 수 있도록 주선해 주셨다. 집 주변의 텃밭에서 기른 깻잎을 시장에 내다 팔기도 했다. 중학교 2학년 때 가정(과목) 선생님은 자신의 어린 자녀를 돌보며 가르치는 가정교사로 일하게 해 주었다. 중3이 되었을 무렵 어머니는 온천3동 대로변 길가에 ‘전주식당’을 열었다. 가게 건너에 금성사(LG그룹 전신)가, 뒤에는 대우실업 공장이 있었다. 음식 솜씨가 좋은 어머니의 넉넉한 마음 씀씀이에 손님은 끊이지 않았다. 주말에 결혼식 하객 손님이 있으면 고3 때도 식당에 달려 나가 갈비탕 숫자를 세어야 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어렵게 자랐지만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을 것이라는 긍정 속에서 한 걸음씩 걸어왔다. 중학교를 같이 다닌 친구 6명은 고등학교와 대학은 다르지만 지금까지 끈끈한 우정을 나누며 산다.
-모교 후배에게 오랜 기간 장학금을 주고 있다.
▶부산에서 초중고를 다니던 때는 대부분 어렵고 힘들었다. 특히 별다른 직업과 재산 없이 부산으로 온 우리 가족은 더 어려웠다. 네 살 위 언니는 일찍이 일터로 나갔다. 나중에 검정고시를 거쳐 중·고교 과정을 마쳤다. 중학교 때부터 줄곧 장학금을 받고 공부했다. 부산의 중·고 후배에게 조금의 희망과 격려를 나눠 주고 싶었다. 받은 은혜와 도움을 더 크게 오래 지역사회와 후배에게 되돌려줄 것이다. 힘든 과정 속에도 희망은 있다고 격려하고 또 응원하고 있다.
-부울경이 통합되고 가덕신공항이 열린다.
▶IT 기술로 인한 소통과 통합, 교통망의 발달로 도시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 따라서 부울경 메가시티를 추진하는 것은 경제적, 심리적 통합의 면에서 긍정적인 효과가 많다. 다만, 가덕신공항과 같은 국가의 대형 프로젝트는 장기간 검토되어야 하고, 심도 있는 국민 공감대 형성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래야 국고의 충실한 집행 및 국민통합에 도움이 된다. 이를 보완하는 노력이 이제부터라도 지속적이고 일관되게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조현욱 변호사는
▷전북 순창 출생(1964) ▷학력: 부산 온천초등, 이사벨여중, 동래여고 졸업(1980) 서울대 법대 졸업(1987) 미국 듀크대학 로스쿨 졸업(2002) ▷경력 : 법률구조공단 공익변호사(1990.3~2000.1) 대전지법 판사(2000.2~2002.5) 대구지법 판사(2002.5.~2003.2) 대구고법 판사(2003.2~2004.2) 인천지법 판사(2004.2.~2006.2) 전주지법 부장판사(2006.2~2007.2) 인천지법 부장판사(2007.2~2008.2) 인천시 공직자윤리위원장(2011.6~2013.5) 중앙행정심판위원(2015.5~2021.4) 국가인권위 비상임인권위원(2017.6~2020.12) 법제처 법령해석심의위원(2017.10~) 대검찰청 검찰수사심의위원(2018.1~) 한국여성변호사회장(2018.1~2020.1) 대한변호사협회 부회장(2018.2~2020.2) 국세행정개혁위원(2018.2~2021.2) 헌법재판소 공직자윤리위원(20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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