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울경을 빛낸 출향인 <40> 이종욱 가톨릭의대 내과교수
조혈모세포이식 국내 권위자 … 의료기술 개도국 전수도

 

오랫동안 영화나 드라마에서 불치병으로 묘사된 ‘백혈병’은 지금은 ‘완치’가 가능하다. 1983년 가톨릭의대 명동 성모병원 내과 김동집 교수와 김춘추 교수팀이 백혈병 환자에게 조혈모세포이식을 성공하면서 그 첫 문을 열었다.

가톨릭의대 서울성모병원 이종욱(64) 교수는 당시 인턴으로서 그 역사적인 장면을 지켜봤다. 처음에는 간을 치료하는 의사가 되려고 했으나 스승 김춘추 교수를 만난 이후 32년간 혈액 전문의의 길을 걸었다. 이 교수는 대한민국 최고의 골수이식술 대가로 우뚝 섰다. 최근까지 가톨릭대 대학원장을 지낸 그는 정년을 앞두고 지난달 모교인 경남고 재경총동문회로부터 ‘2021년 자랑스러운 용마인상’을 수상했다. 지난달 20일 서울성모병원 별관 7층 연구실에서 이 교수를 만났다.

-가톨릭조혈모세포이식센터가 세계적 수준의 혈액병원으로 발전했다.

▶1994~1996년 미국 프레드 허친슨 암 연구센터에서 연수했는데, 그곳의 유기적인 연구 시스템을 한국에 접목하겠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보고 배웠다. 2011년 서울성모병원 조혈모세포이식센터 소장직을 맡은 후 실행에 옮겼다. 질환별 진료를 세분화, 전문화해 심도 있는 진료와 연구를 했다. 질환을 중심으로 6개 파트로 나눴는데, 나는 재생불량성 빈혈을 맡았다. 그 결과 2010년과 2021년을 비교하면 조혈모세포이식 건수가 연간 318건에서 575건으로 180% 증가했다.

조혈모세포이식센터는 2018년 국내 최초로 혈액질환을 종합적으로 치료하는 혈액병원으로 승격했다. 20명의 혈액전문 교수가 종사한다. 1983년부터 2021년까지 9465명의 환자에게 조혈모세포이식을 성공했다. 세계 최고 수준에 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난도가 높은 동종조혈모세포이식 성공률이 74.3%에 달한다는 것은 놀라운 수치다.

-골수이식을 조혈모세포이식이라고 부르는데.

▶과거에는 혈액을 만드는 원시조혈모세포가 골수에만 있는 것으로 알아서 ‘골수이식’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말초혈액, 제대혈에도 존재하고 임상에서 사용 가능하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이제는 ‘조혈모세포이식’이라고 한다. 과거에는 방사선 및 항암제 부작용으로 고령 환자에게는 적용이 어려웠으나 최근에는 고령 환자도 이식 치료가 훨씬 쉬워졌다. 이식유전자가 완전히 일치해야 했던 과거와 달리 최근에는 가족 내 유전자가 50%만 맞아도 비슷한 효과를 볼 수 있다.

-학회 및 연구활동에도 많은 성과를 이뤘다.

▶대한혈액학회 상임이사, 대한조혈모세포이식학회 이사장 및 회장, 대한수혈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아·태 조혈모세포이식학회 상임위원, 미국혈액학회 및 유럽혈액학회 정회원이다. 2006년 황우석 사건 이후 윤리적인 줄기세포 연구에 가톨릭 서울대교구에서 연구비 100억 원을 쾌척했다. 2009년부터 2013년까지 성체줄기세포 연구를 위한 가톨릭세포치료사업단 단장으로 재임하면서 세포 치료제를 생산할 수 있는 의약품생산 안전시설을 건립했다. 2017년에는 대한조혈모세포이식학회 학술대회를 국제학술대회로 승격시켰다. 특히 동남아시아 및 개발도상국가의 많은 의사가 참여하도록 지원하고 있다. 몽골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2019년 부산 벡스코에서 아·태 조혈모세포이식학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그동안 국제학술지 331편, 국내학술지 137편의 연구논문을 발표했다. 2020년 2월 국제조혈모세포이식연구기관에서 수여하는 학술공로상을 한국인 최초로 받았다. 매년 전 세계에서 1명만 선정해 미국 조혈모세포이식학술대회 석상에서 수여하는데, 개인적으로도 영광이고 국내 관련 질환의 치료와 연구 수준이 국제적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평생을 내과 의사로, 혈액전문 의사로 지냈다.

▶아버지가 병리학자이자 의사다. 어릴 때부터 당연히 의사는 내 길이라고 생각했다. 평생 현미경을 놓고 연구와 진단을 한 아버지와는 다른 길을 가고 싶었다. 아버지는 환자를 진료하는 임상의사도 아니어서 (돈도 잘 못 버는) 의사 같지 않은 의사라며 나에게 병리과는 가지 말라고 한 어머니의 조언도 한몫했다(웃음). 프레드 허친슨 암 연구센터는 전 세계 BMT 전문가(조혈모세포이식 의사)를 길러낸 메카다. 내가 그곳에서 연수했고, 우리 성모병원도 세계적인 수준의 국내 중심병원으로 자리 잡았다. 대한혈액학회 이사장 및 전남대 화순병원 병원장을 역임한 전남의대 김형준 교수 등 다양한 병원 의사가 교수요원으로 3개월 이상 연수를 다녀갔다. 부울경 출신으로는 부산의대 신호진 교수, 울산대병원 박재후 교수가 있다.

-아버지가 한국 병리학계의 태두 이중달 한양대 명예교수다.

▶아버지는 본적이 경북 상주인데, 한국전쟁 당시 부산으로 피란했다. 아버지는 서울 경신고를 졸업하고 부산의대로 진학해 부산의대 1회 졸업생이 됐다. 부산대 의대 교수로 근무하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미국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워싱턴 대학으로 연수 갔다. 지금이야 부모가 해외 연수를 가면 가족이 함께 가지만 그때는 비행기 탈 돈이 없어 그렇게 못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미국에서 5년 만에 귀국했다. 통상 연수는 1, 2년 걸리는데, 병리학 한 번 제대로 공부해서 오겠다는 독한 각오를 했다고 한다. 1960년대 우리나라는 병리학의 불모지였다. 당시 장기려 병원장의 추천으로 부산 복음병원에서 귀국 후 첫 근무를 했다. 중요한 병리적 진단은 모두 아버지 몫이었고, 전국적인 명성을 구가하던 아버지는 내가 고등학교 졸업 무렵 서울로 옮겼다. 강북삼성병원의 전신인 고려병원에서 근무하시다 경희의대 병리학교실 주임교수로 복귀했다. 한양의대로 옮겨 학장을 역임했다. 1970, 80년대 국내 병리학의 발전을 일군 병리학계의 원로다. 대학교수를 마친 뒤 서울송도병원장으로 10여 년 있었다. “이제는 그것도 힘들어서 못 하겠다”고 하시지만 지금도 매주 세 번 송도병원으로 출근한다.

-쉽지 않은 길을 걸어왔다. 수많은 생명을 살렸다.

▶조혈모세포이식을 하는 질환은 혈액 질환이 대부분이다. 대표적인 것은 혈액암으로, 흔히 말하는 백혈병이다. 그리고 임파종, 다발성 골수종이 있다. 암이 아닌 것으로 재생불량성빈혈이 있다. 둘 다 골수이식이 필요하다. 그런데 골수이식을 했을 때 결과는 좀 다르다. 재생불량성빈혈이 백혈병보다 결과가 좀 더 좋다. 백혈병은 암이니까 10~20%는 재발할 수 있고 20%는 합병증으로 사망할 수가 있다. 그래서 60%가 완치된다. 재생불량성빈혈은 70~80%가 완치된다. 그런데 이런 완치율 이면에 사망률이 있다. 완치율과 생존율, 치료의 성공률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숙연해지는 것이다.

피터 게일이라는 UCLA 대학의 유명한 교수가 있었다. 사전 신고 없이 체르노빌 원자로 폭파 현장에 다녀온 벌을 받아 미국에서 떠나 영국에 있다. 방사선생물학을 전공한 그는 일본 후쿠시마 원자로 폭발 현장에도 다녀왔다. 언제가 그가 학술대회 초청강의에서 의사에게 한 말이 뼈아프게 기억에 남는다. “후세 사람은 베이브 루스의 714개의 홈런 수를 기억하지, 삼진 스트라이크 아웃 수를 기억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 그는 홈런 못지않은 많은 스트라이크 삼진 아웃을 당했다. 그가 만일 그 삼진 아웃에 마음을 빼앗겼다면 오늘의 홈런왕 베이브 루스는 없을 것이다. 많이 죽어야 많이 산다. 우리가 지금 60% 완치시켰다면 40%는 죽은 것이다. 많이 살리려면 많이 죽는 것을 봐야 한다.”
종종 몇 명을 살렸냐는 질문을 받는다. 솔직히 그런 질문에 답하는 것은 쭈글스럽다(‘민망하다’는 의미의 경상도 사투리). 면역저하 환자는 갑자기 패혈증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많다. 선제적이고 공격적인 치료가 필요하다. 초기에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결과를 기다리는 것이 습관이 됐다. 이식받은 환자는 불임이 되기 쉬운데, 이식 후 무사히 아기를 낳아 진료실에서 아기와 환자를 만날 때가 가장 보람 있다. 축복이고 경이롭다.

-몽골의 대통령 최고 훈장도 받았다.

▶2017년 7월 몽골 대통령 최고 훈장인 ‘북극성’ 훈장과 보건부 장관 공훈 훈장을 받았다. 몽골에는 조혈모세포이식을 할 수 있는 병원이 없었다. 몽골에서 독립적으로 조혈모세포이식을 수행할 수 있게 만드는 게 목표다. 5년에 걸친 다각도의 지원은 몽골 정부의 요청으로 이뤄졌다. 현재 몽골에서 자가이식은 독자적으로 할 수 있지만 난도가 높은 동종이식은 아직 여의치 않아 계속 도와줘야 한다. 지금도 계속 교류하고 있다.

-어린 시절 경북에서 부산으로, 다시 대구와 부산으로 옮겨 다녔다.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다. 1957년생 닭띠인데, 호적을 늦게 신고해 1958년으로 돼 있다. 부산 시절 ‘경상북도 말투’로 인해 놀림을 많이 받았다. 아버지가 부산의대 조교를 거쳐 대구 통합병원에서 군의관으로 근무했기 때문에 대구에서 초등학교 1학년을 마쳤다. 군의관 제대 후 부산의대 병리학교실 전임강사로 옮긴 아버지를 따라 부산으로 왔다.

부산 동신초등학교 시절 콩나물 반에서 학교 다닌 기억은 지워지지 않는다. 1970년 최초의 무시험 추첨으로 송도중학교에 진학했고, 1973년 부산지역 마지막 입시시험을 치르고 경남고에 입학했다. 한국 현대 교육사에서 전무후무한 경험을 한 세대다. 송도중에 배정되기 전까지는 송도에는 해수욕장이 있는지 알았어도 중학교가 있는지는 몰랐다. 중학교 입학식에서 어머니가 걱정돼 담임교사에게 졸업생 중 경남고와 부산고에 몇 명이 갔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답은 0명이었다. 어머니 얼굴이 노래졌다. 그 얼굴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선생님은 학생을 명문고에 진학시키겠다는 열의를 갖고 열심히 가르쳤다. 송도중 최초로 경남고에 여덟 명이나 합격해 학교에 경사가 났다.

-롯데 야구선수 이대호의 배트를 걸어두고 있다.

▶야구를 좋아한다. 아버지가 미국 연수를 가시면서 야구 글로브를 선물로 주고 갔다. 당시 부산은 야구의 도시였다. 공터만 있으면 삼삼오오 모여서 야구를 즐겼다. 경남고 야구는 전국적인 명성을 지녔다. 김용희 선수가 경남고 28회이고 내가 1학년 때 3학년이었다. 후배 중 최동원 투수가 31회다. 이대호 선수도 경남고 후배인데, 자신이 쓰는 것과 같은 배트 100개를 팬에게 선물로 내놓았다. 그중의 하나가 운 좋게 내 손에 들어왔다. 이대호 선수의 팬이다.

-부울경이 메가시티가 돼 아시아 중심도시로 나가려면 어찌해야 하나.

▶지역 전문가와 함께 다양한 사람이 모여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짜내야 한다. 공항과 항구의 새로운 건축 이야기도 나오는데 도시 건축, 공항과 항만 설계사뿐 아니라 가능한 분야에서 많이 참가해 시대를 뛰어넘는 콘텐츠를 개발하는 것이 중요하다. 세 도시가 어떻게 상호 시너지를 얻을 수 있을지 의논해보자. 타당성 검토도 해야 한다. 합리적인 근거 없이 정치적인 구호 아래 무조건 밀고 나갈 수 없다. 제3자의 견해도 들어야 한다. 합당한 재원 마련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적절한 자원·재원·인력과 효율성 있는 아이템·콘텐츠가 함께해야 한다. 의료 분야로 국한하면 경쟁력 있는 분야를 발굴하고 이에 집중적인 투자를 지속해야 한다.


◇이종욱 교수는

▷1957년(호적은 1958년) 경북 상주 출생 ▷학력 : 부산 동신초·송도중·경남고·가톨릭대 의대 졸업, 동 대학원 내과학 의학석사 및 의학박사 ▷경력 : 가톨릭대 의대 혈액내과 교수(현), 프레드 허친슨 암연구센터 연구강사(미국 시애틀), 가톨릭세포치료사업단장, 가톨릭의대 서울성모병원 혈액내과분과장, 동 병원 조혈모세포이식센터 소장, 가톨릭대 대학원장 ▷학회 : 대한혈액학회지 편집위원, 한국의료과학저널 편집위원, 란셋 온콜로지(Lancet Oncology) 한국판 편집위원, 식품의약품안전처 중앙약사심의위 위원, 건강심사평가원 비상근 심사위원, 대한혈액학회 상임이사, 대한혈액학회 재생불량빈혈연구회 초대위원장, 대한조혈모세포이식학회 이사장 및 회장, 2019 아·태 조혈모세포이식학회장 ▷수상 : 2011년도 성의 최우수 논문상(가톨릭대), 대한혈액학회 최우수 논문상, 몽고대통령 최고훈장 수상, 대한혈액학회 학술상, 국제조혈모세포이식연구기관 학술공로상, 한국의 우수연구자 선정(한국연구재단), 올해의 자랑스러운 가톨릭의대인상(가톨릭의대 총동문회), 2021 자랑스러운 용마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