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울경을 빛낸 출향인 <48> 안창홍 서양화가
현대인 헛된 욕망 고발한 화가 “돈을 독으로 여기며 그려”

 

2020년 12월 서울에서 에콰도르 국민 작가이자 남미의 영웅인 ‘오스왈도 과야사민 특별기획전’이 개최됐다. 한국과 에콰도르 수교 60주년을 맞아 열린 기획전은 코로나19 속에서도 성황을 이뤘다. 답방 전시 ‘안창홍 특별초대전’은 에콰도르 수도 키토에서 지난해 11월 열렸다. 두 전시 모두 양국에서 뜨거운 찬사를 받았다. 이를 기념하는 귀국 전 ‘안창홍-유령 패션’ 전시회가 지난 2월 23일 서울 사비나미술관에서 개막됐다. 안창홍(69) 작가는 이번 전시회를 위해 신작을 추가하고 에콰도르에서 전시했던 작품을 전시 공간에 맞게 재구성했다.

안 작가의 대표작은 대부분 연작이다. ‘아리랑 연작’과 ‘이름도 없는 연작’은 역사의 주체이면서 이름도 없이 묻힌 민초의 진혼곡이다. ‘베드키우치 연작’은 우리 이웃의 건강한 몸을 누드로 그렸다. ‘유령 패션 연작’은 문명 비판 작품이다. ‘눈먼 자들 연작’은 집단 체면으로 우민화되어 가는 우리들 이야기다. ‘마스크 연작’은 보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통제된 현실의 우리를 고발하고 있다. ‘화가의 손 연작’은 화가의 삶과 가치를 그렸다. 이번 전시 역시 서너 개의 연작이 중심이다. 이들 작품을 통해 그는 일관되게 우리 사회와 작가가 지향해야 할 가치를 주제로 다룬다. 자본주의의 속성인 끝없는 탐욕을 경계하고 그것을 지탱하는 권력을 고발한다. 자신의 “등짝을 후려치면서” 돈과 권력으로부터 자신을 당당히 지켜왔다. 상업주의와 철저히 거리를 둔다. 기성 화단과도 마찬가지다. 그는 제도화된 교육체제에 동의하지 않는다. 덕분에 최종 학력은 고졸이다.

서울과 키토를 잇는 세 번의 전시를 총괄한 사비나미술관 이명옥 관장은 안 작가를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한국 미술계에 보기 드문 독창성과 화가로서의 재능과 예술가로서의 결기를 모두 갖추었다. 학연과 지연으로 얽힌 한국 화단에 얽매이지 않고 오직 실력만으로 성공한 매우 소중한 작가”라고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1973년 부산 대청동에 화실을 열었다. 제도권 교육을 인정하지 않으며 입시생을 가르치는 자기모순에 마음이 괴로웠다. 라면 한 그릇 먹기 어려웠던 시절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다. 1989년 봄 가족만 남겨두고 도망치듯 서울로 옮겼다. 서울에서 연 화곡동 작업실은 채 8개월을 넘기지 못했다. 밀려드는 손님들로 제대로 작품활동을 할 수 없었다. 삶도 거처도 고립된 섬, 지금의 경기 양평군으로 옮겼다. 쓰러져 가는 폐가였다. 비가 와 마을 앞 개천에 물이 넘치면 들어갈 수도 나올 수도 없이 갇혀야 했다. 그곳에서 30여 년, 그는 홀로 외로움을 견뎠다. ‘상업주의’에 젖은 화가가 되지 않으려 지독한 몸부림을 쳤다. 돈을 독(毒)으로 여기고 자신을 지켰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세상에 덜 알려졌지만 더 탄탄하게 여물었다. ‘오스왈도 과야사민’과 교환 전시 작가로 대한민국을 대표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정신적 자유를 얻은 대신 천형을 짊어졌다”는 그를 지난달 양평군 작업실에서 만났다.

-작품 ‘유령 패션’은 유령 그리기의 본격 시작이다.

▶2020년 12월 18일 사비나미술관에서 열린 ‘오스왈도 과야사민 특별기획전’의 답방 차원에서 ‘안창홍 특별초대전’이 이어졌다. 오스왈도 과야사민(1919~1999)은 평생을 소수민족 인디오의 편에 서서 싸운 화가다. 그에 필적할 대한민국의 대표작가로 선정된 것인 내 생애 매우 큰 영광이다. 지난해 11월 4일부터 12월 14일까지 에콰도르 수도 키토 소재 과야사민 미술관과 ‘인류의 예배당 ’두 곳에서 나의 작품이 오스왈도 과야사민의 작품과 나란히 전시됐다. 그중 인류의 예배당은 30년 전에 프란시스코 고야(1746~1828) 전시회가 열린 후 단 한 번도 개방된 적이 없는 귀중한 장소였다. 이때 전시했던 작품을 중심으로 사비나 미술관의 전시 공간에 맞게 재구성해 귀국 전시회 ‘안창홍 유령 패션’을 준비했다. 오래전부터 유령의 도시를 그릴 계획이 있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본격적인 유령 그리기가 앞당겨진 셈이다. ‘유령 패션’을 유화로, 조각으로 빚어냈다. 환조(丸彫)로 조각된 ‘유령 패션’은 귀국 보고 전을 준비하면서 만든 신작들이다. 이들은 코로나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2020년 혼자 작업실에 갇히면서 얻어진 디지털 펜화에서 시작됐다. 현대사회 자본주의 본질 중 계급성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패션 화보의 상징을 포착했다. 소비 욕구와 물질에 대한 욕망을 그렸다. 패션 화보에서 오롯이 인물을 다 지워냈다. 인물이 사라져버리자 욕망의 주체가 사라져 버린 ‘유령 패션’이 됐다. 에콰도르 전시 땐 유화로 작업했다. 디지털 펜화가 유화로 재탄생한 것이다. 귀국 전시회에서 투명 패널에 이미지를 넣은 ‘유령 패션’ 디지털 패널 150점을 만들었다.

-작품 ‘화가의 손’은 수백 가지 소재를 직접 만들어 썼다. 규모도 내용도 충격적이다.

▶어느 날 아침, 물감만 버리는 쓰레기통 속에 백골이 된 내 손이 붓을 잡고 있는 환상을 보았다. 순간적으로 화가의 인생이 “그렇게 죽어서까지, 백골로도 붓을 잡고 있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환각으로 본 모습을 재현하기 위해 찌꺼기 물감 더미 위에 붓을 잡은 손 모양의 오브제를 놓고 투명 레진(Resin)을 부어 굳힌 후 쓰레기통과 분리했다. 2007년 봄에 완성한 ‘화가의 손’ 원작이다. 이를 2009년 대형 부조 작품 3개의 연작으로 만들었다. 두께 60㎝에 좌우가 각각 3m, 3.7m 규모다. 화가의 일상을 액면 그대로 구현했다. 유사 금박을 입혀 화려하게 만든 작품은 돈 버는 데 성공한 (상업적) 화가의 삶을 표현한 것이다. 어두운색으로 덮인 세 번째 작품은 정신과 작품이 훌륭해도 작품이 빛을 보지 못해 궁핍과 좌절로 절망하는 화가의 삶을 그렸다. 자본주의에서 예술가는 흥행과 상업성에 실패하면 아무리 좋은 내용의 그림도 외면당하고 만다. 우울하게 살다가 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돈을 버는 것이 미술가의 성공은 아니다. 깨어 있는 화가라면 시대의 진통과 같이 해야 한다. 더불어 살아가는 삶, 시대의 파수꾼으로 눈을 뜨고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 성찰을 통해서 끝없이 작품을 만들어내야 하므로 늘 고통 속에서 사는 것이다. 작품 발표 당시 대단한 반향을 불러온 ‘화가의 손’ 한 점의 무게는 300㎏에 달한다. 300호 대작이다. 만만찮은 시간과 비용이 들었다.

-우울하고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궁핍 자체가 가지는 감성도 있다.

▶절실한 외로움이 없으면 작가는 못 된다. 각성한 사람으로서 살아갈 자격이 없다. 똑같은 인생을 똑같은 방식으로 산다는 자체가 재미없다. 궁핍 자체가 가지는 감성도 있다. 지식이라는 것은 결국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경험을 통해서 활성화된다. 내가 원하는 것은 세상의 바다에 흩어져 있다. 그것을 낚아 올리는 일, 보고 경험하고 느끼는 것이 내 방식의 공부다. 어떤 틀에 박히거나 일반화된 활자를 통한 지식 쌓기보단 삶을 통해, 관찰과 경험을 통해서 보고 받아들이고 고뇌하고 그걸 나만의 조형언어로 작품으로 표출해왔다. 그래서 내가 가진 본질적인 삶의 결이나 작업의 내용은 일반적이지 않다. 작가에게 유행을 따르거나 흉내 내기는 가장 멀리 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이 내가 가진 생각이나 작업 형식과 내용을 처음 마주했을 때 낯설어한다. 지금은 적지 않은 사람이 나의 개성적이고 자생적인 조형 세계에 공감하며 두터운 마니아도 생겼다. 나는 작업을 위해 거의 늘 혼자 지낸다. 외롭지 않으면 작업이 되지 않는다. 돌아보면 외롭고 우울한 어린 시절이었다. 그때부터 외로움과 친구가 됐다. 중학교 졸업 후 완전히 독립했다. 입주 가정교사도 하고 국제시장 핸드백 가게에서 도안(圖案) 일도 했다. 그림 그리는 일만이 나를 지탱해 준 구원의 힘이었다.

-어른 다운 멋진 스승을 만나 배우고 자랐다. 폐암도 이겨냈다.

▶1972년 송혜수(1913~2005) 선생님의 문하생이 되었다. 그분을 통해 삶이 (돈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님을 배웠다. 화가의 자부심도 가지게 됐다. 어느 날 대학교수로 있는 그의 제자들이 찾아왔다. “임자들도 이렇게 그릴 수 있나?”라며 내 그림을 불쑥 꺼내 놓기도 하셨다. 고등학교 졸업식 날 미술실에 홀로 남아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은사 이경훈 선생님이 나에게 “벽에 붙여 놓은 그림을 다 떼어가라. 혹시 자네 그림이 돈이 될지 몰라”고 하셨다. 나를 격려하신 것이다. 10여 년 전 내가 폐암에 걸렸다. 수술받고 1년 뒤 부산 시립미술관에서 초대전을 가졌다. 매일 마시든 술을 5년 동안 한 잔도 안 마셨다. 삶에 대한 애착이 더 강해졌다. 하고 싶고 해야 할 것이 많아 그대로 주저앉을 수 없었다. 암 수술하면서 우울증이 사라졌다. 더욱더 부지런해지고 자유로워졌다. 죽음의 문턱을 밟고 나니 더 이상 두려운 것도 없었다. 암 수술 후 항암치료 과정과 회복기에 3m40㎝짜리 대형 그림을 여러 점 그렸다.

-부울경이 미술과 문화에 관한 고민을 더 깊게 해야 한다.

▶부울경이 갖고 있는 예술적 잠재 에너지를 한 곳에 좀 끌어다 모으면 좋겠다. 물론 다양성이 보장돼야 한다. 부울경이 특별연합으로 거의 40년 만에 다시 하나로 되는 데 정서적 역사적 경제적 문화적 공동체로서의 회복은 소중하다. 몇 해 전, 여행 중에 이탈리아 까라라 부근에서 세계적인 작가들이 모이는 작업실 동네를 본 적이 있다. 대개 1년 내내 머물지는 않는다. 내로라하는 세계적인 작가가 좋은 계절에 작업하고 간다. 잠시 머물다 가도 그 작가의 작업장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파워가 된다. 그런 게 필요하다. 그러면서 지역 화가와 연대하며 서로에게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한다. 양질의 화가가 부산에 서식할 수 있게 만들 필요가 있다. 부산 작가가 부산을 떠나지 않아도 되게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작가에게 자긍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기획이 따라줘야 한다. 생계를 해결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시스템도 필요하고. 거주하면서 부산의 작가와 종사자가 호흡할 수 있는 거주작업공간(Residence)도 필요하다. 새로 출범한 ‘부울경통합광역청’ 자체가 미술과 문화에 관한 진보적 생각을 가져야 하고 과감하게 투자하며 미술 사대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안창홍 화백은

▷1953년 경남 밀양 출생 ▷학력 :대구 남산초, 부산 대신중, 동아고 졸업(1973) ▷개인전: 1981 안창홍 작품전(공간화랑), 1987 새와 사람이야기(갤러리 누보), 2001 모래바람-고비사막 가는 길(이목화랑), 2006 얼굴(사비나미술관), 2009 시대의 초상(부산시립미술관), 2011 불편한 진실(가나화랑), 2012 아리랑(페이지 갤러리), 2013 ‘텔레-비’전(갤러리 현대), 2014 ‘남과 북’ 기억공작소(봉산문화회관), 2015 나르지 못하는 새, 안창홍 1972-2015(아라리오 갤러리), 2017 눈 먼 자들(조현화랑), 2019 화가의 심장(아라리오 갤러리), 2021 안창홍의 디지털 펜화 유령패션(Haunting Loneliness, 호리아트스페이스), 2022 한국-에콰도르 수교 60주년 기념 귀국전 ‘안창홍-유령 패션’(사비나미술관 ) 등 40여 회 ▷단체전 : 2006 한국현대미술 100년(국립현대미술관 서울), 2008 봄날은 간다(광주시립미술관), 2013 사람아 사람아! <신학철,안창홍>(경기도립미술관), 2018 균열II:세상을 향한 눈, 영원한 시선(국립현대미술관 과천), 2021 거대한 일상-지층의 역전(부산시립미술관) 등 80여 회 ▷해외전 : 1989 카뉴 국제 회화제(프랑스), 2003 제1회 북경비엔날레(중국), 2007 한국 미술의 리얼리즘-민중의 고동(일본), 2021 한국-에콰도르 수교 60주년 기념 초대전(에콰도르), 2022 제 59회 베니스 비엔날레 5·18 민주화운동 특별전(이탈리아) ▷수상 : 카뉴 국제회화제 심사위원 특별상(프랑스, 1989),부일미술대상(2006),이인성미술상(2009),이중섭미술상(2013) ▷작품소장 :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경남도립미술관, 사비나미술관, 93뮤지엄, 금호미술관, 경기도미술관, 대구미술관 ▷기타 : 원로작가 디지털 아카이빙 대상 작가 선정(2019)